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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명문에서만 확인되는 액정좌리(掖庭坐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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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좌리 혹은 기인액정좌리하고도 한다. 액정(掖庭)은 액정서를 가리키지만, 좌리(坐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본 명문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액정좌리는 액정서 기인과 관련된 공인으로 판단된다. 명문에 따르면 액정좌리의 공인권이 일정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인권을 발급하는 명문은 대부분 기인대방의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기인공물 주인권을 일부로 보인다.
액정좌리 혹은 기인액정좌리하고도 한다. 액정(掖庭)은 액정서를 가리키지만, 좌리(坐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본 명문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액정좌리는 액정서 기인과 관련된 공인으로 판단된다. 명문에 따르면 액정좌리의 공인권이 일정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또한 공인권을 발급하는 명문은 대부분 기인대방의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기인공물 주인권을 일부로 보인다.
1782년 안처신(安處信) 명문(明文)
기인공방에서 국역을 수행하는데 부채가 점점 많아지지 기인공방에서는 부채를 상환할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기존의 공인권과는 별개로 액정좌리 30명을 신설하고 좌리가(坐里價)는 150냥으로 정하여 허락을 받았다. 이 때가 바로 1782년(정조 6)이었다. 혹 액정서에서 이를 빌미로 액수를 줄이기 된다면 그 손실분은 모두 기인공방에서 지급하도록 약정하였다.
이후 여러 명문을 통해 액정좌리의 공인권을 활발하게 거래가 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창설 당시에는 1명의 공인가가 150냥이었는데 20여년이 지난 1803년이 되면 공인권 거래액은 400냥이 되었다. 약 3배 정도로 뛰어 올랐던 것이다. 1826년이 되면 공인권 거래액은 540냥에 이르기도 하였다. 당시 1명의 액정좌리 공인권을 가지고 있었던 안상현은 김근이라는 사람에게 공인권을 팔았다. 그러나 부채가 너무 많아 갚을 방법이 없자 이수민에게서 540냥에 다시 공인권을 사들여 기인 입역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즉 필요에 따라서는 개인의 부채 상황을 위한 방법으로 기인 입역이 활용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1846년과 1860년이 되면 공인권의 거래액은 하락하여 500냥이 되었다. 당시 공인권 주인 박규석은 자신의 부친이 살아 있을 때 전효일에게서 매득한 권리 1명, 전택정에게서 매득한 권리 1명, 자신이 이일영에게서 매득한 권리 2명 즉 4명의 공인권을 가지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2,000냥을 받고 팔았다. 그러므로 1명당 500냥이 되는 셈이다. 당시 공인권은 1명이 1명분의 권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권리를 가지고 행사할 수 있었다.
액정좌리가 창설된지 100여년이 지난 1885년에는 액정좌리의 액수가 더 늘어났다. 1782년 당시에도 국역은 많고 부채는 점점 늘어나자 액정좌리라는 공인권을 창설하여 기안공방의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100여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여 액정좌리를 7명 늘리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1782년 당시에는 1명당 150냥이었으나 1885년에는 당시 거래되었던 공인권의 시가 500냥에 맞추어 공인권 거래가가 형성되었다. 즉 기인공방의 재정 문제를 구조적 해결보다는 새로운 공인권을 창설하여 수입을 늘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셈이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782년 안처신(安處信) 명문(明文)

-

안처신(安處信) 

2

1803년 김근(金根) 명문(明文)

-

김근(金根) 

3

1803년 이수민(李秀民) 명문(明文)

-

이수민(李秀民) 

4

1826년 명문(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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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846년 명문(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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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860년 명문(明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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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885년 기인첩문(其人帖文)

기인대방(其人大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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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 박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