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에 綿紬廛의 실태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설연도 : 국초에 설립.
廛의 인원 수 : 40여명. 영업자는 2명.
임원 명칭 : 大行首 1명, 領位 1명, 所任 2명, 次知 10명.
신입자의 禮錢 : 族屬 10圓, 額外人은 원래 존재치 않음.
廛房 칸수 : 1房 6칸, 2房 6칸, 3房 6칸.
文券의 유무 : 계해년(1863) 都家에 불이 났을 때 각 항의 文簿는 불에 탔으므로 없음.
營建의 연월일 : 헌종 12년(1846) 3월 16일 上樑. 1905년 5월 泮製[성균관 제술 시험] 때 바친 돈 670여円 가운데 400円은 빚을 내었고 270여円은 廛人들이 담당함.
營建의 비용 및 그 출처 : 계해년(1863)에 불이 났을 때 각 항의 文簿가 불에 탔으므로 고증할 수 없음.
都家 : 中部 仁平坊 禁后洞 30統2戶. 瓦家 6칸. 文券 있음. 1905년 5월에 380円에 매입했지만 文券은 없음.
황실이나 정부에서 구휼한 금액 옥은 빌려준 금액의 유무 : 구휼이나 빌려준 금액은 없음.
三月十六日上樑。太皇帝光武九年乙巳五月泮製時。所入錢。六百七十餘円內。四百円他處出債。二百七十餘円。廛人自當。
營造費額。癸亥年都家失火時。各項文簿燒燼。故無憑可考。
營造費出處。癸亥年都家失火時。各項文簿燒燼。故未詳不可考。
都家。中部仁平坊禁后洞三十統二戶。瓦家六間。文券有。太皇帝光武九年乙巳五月 日。三百八十円買得。而文券無。
皇室或政府救恤金或貸付金有無。有則年月日及金額幾何。救恤金無。貸付金無。乙巳五月日。
고동환, 「조선후기 市廛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 현실』 44, 한국역사연구회, 2002.
고동환, 「개항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 綿紬廛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 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