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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주전(綿紬廛) 실태(實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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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E.0000.0000-20160331.KY_X_1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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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명문문기류-시전문서 | 경제-상업-시전문서
· 형태사항 1張 | 종이 | 국한문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1580

연결자료 묶음해제

안내정보

대한제국 말기에 면주전(綿紬廛)의 실태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면주전의 연혁, 전방(廛房)의 수, 소속 인원 수 및 국가에 납부하는 물품과 신역(身役)의 수량을 정히 놓고 있다.

상세정보

대한제국 말기에 綿紬廛의 실태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국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면주전의 설치 연혁 : 국초에 설립되었음.
󰋯廛房의 수 : 3房, 매房에 10房이 있음. 1902년 2월에 화재가 나서 1905년 3월에 다시 건축했음. 상인들에게 돈을 거두어 營建함.
󰋯현재 都中에 관계된 인원 : 40여명.
󰋯廛房 전체에 대한 文券 유무 : 1863년에 화재가 났을 때 불에 타서, 고증할만한 것이 없음.
󰋯進排하는 물품 : 매년 정월에 上紬 30필을 어전에 진상한다. 受價는 필당 9냥씩이다. 매년 6월에 染藍水紬를 각 殿宮에 1동(1同=50필)씩 진상한다. 受價는 同당 700냥씩이다. 白吐紬, 各色吐紬, 經用紬, 給代紬, 各色水紬는 정해진 바 없이 進排한다. 吐紬의 受價는 필당 16냥 5전씩이다. 經用紬, 給代紬의 受價는 필당 6냥씩이다.
󰋯國恤 때 상여꾼[轝士軍] 117명을 대는데, 관아에서 인원수를 점고한 후에 80명은 雜物車子軍으로 國葬都監의 일을 거행하고, 30명은 因山할 때 大轝를 뒤쪽과 왼쪽에서 끌고 가는 일을 거행한다. 布周衣次와 그간에 왕래하는 비용은 돈으로 한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후기 市廛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 현실』 44, 한국역사연구회, 2002.
고동환, 「개항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 綿紬廛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 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집필자 : 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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