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말기에 綿紬廛의 실태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다. 국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면주전의 설치 연혁 : 국초에 설립되었음.
廛房의 수 : 3房, 매房에 10房이 있음. 1902년 2월에 화재가 나서 1905년 3월에 다시 건축했음. 상인들에게 돈을 거두어 營建함.
현재 都中에 관계된 인원 : 40여명.
廛房 전체에 대한 文券 유무 : 1863년에 화재가 났을 때 불에 타서, 고증할만한 것이 없음.
進排하는 물품 : 매년 정월에 上紬 30필을 어전에 진상한다. 受價는 필당 9냥씩이다. 매년 6월에 染藍水紬를 각 殿宮에 1동(1同=50필)씩 진상한다. 受價는 同당 700냥씩이다. 白吐紬, 各色吐紬, 經用紬, 給代紬, 各色水紬는 정해진 바 없이 進排한다. 吐紬의 受價는 필당 16냥 5전씩이다. 經用紬, 給代紬의 受價는 필당 6냥씩이다.
國恤 때 상여꾼[轝士軍] 117명을 대는데, 관아에서 인원수를 점고한 후에 80명은 雜物車子軍으로 國葬都監의 일을 거행하고, 30명은 因山할 때 大轝를 뒤쪽과 왼쪽에서 끌고 가는 일을 거행한다. 布周衣次와 그간에 왕래하는 비용은 돈으로 한다.
참고문헌
고동환, 「조선후기 市廛의 구조와 기능」, 『역사와 현실』 44, 한국역사연구회, 2002.
고동환, 「개항전후기 시전상업의 변화 - 綿紬廛을 중심으로 -」, 『서울학연구』 32,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8.
집필자 : 유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