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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성박람회 협찬회 한국의원부(京城博覽會協贊會韓國議員部)에서 보낸 요청서(要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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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UCI: RIKS+CRMA+KSM-XF.1907.0000-20170331.KY_X_15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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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 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고 | 사회-조직/운영-통고
· 작성주체 발급 : 경성람박회 협찬회(京城覽博會 協贊會)
수취 : 면주전(綿紬廛)
· 작성시기 융희 1(1907)
· 형태사항 1장 | 종이 | 국한문병용
· 현소장처 일본 경도대학 가와이문고
· 청구기호 1594-1

연결자료 묶음해제

안내정보

1907년 9월에 京城覽博會 協贊會 寄附金 趣志書라는 명제로 면주전에 보낸 書簡이다. 京城覽博會 協贊會에서 기부금을 모금하는 까닭은 通衢大路와 각 門의 要害處에 누각을 설치하고 燈을 달기 위해서이다.

상세정보

1907년 9월에 京城覽博會 協贊會 寄附金 趣志書라는 명제로 면주전에 보낸 要請書이다. 京城覽博會 協贊會에서 기부금을 모금하는 까닭은 通衢大路와 각 門의 要害處에 누각을 설치하고 燈을 달기 위해서이다.
경성박람회는 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大同俱樂部를 비롯한 京城 구리개(銅峴: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1가와 2가 사이)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산업의 발달과 무역의 증진을 도모하고 인민의 지식을 발달케 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한국인들에게 한·일의 산업 발달의 우열을 보여줌으로써 통감부 시기 일본이 한일병탄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경성박람회의 개최는 일본이 한국의 경제권에 침투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박람회 회기는 1907년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였으며 입장료는 5원이었고 구입 수량에 따른 할인 혜택을 제공하였다. 관람객은 총 208,417명 입장하였고 이 중 한국인의 비율은 73%에 달하였다. 일본의 침탈이 가속화되던 통감부 시기에 일본은 고종의 양위와 순종의 즉위라는 정치적 상황을 경제·문화 행사로 무마하려 하였다.
집필자 : 임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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