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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암서실(楓石庵書屋)과 자연경실(自然經室)의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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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암장서기(楓石庵藏書記)
서유구의 서재로는 풍석암(楓石庵)과 자연경실(自然經室)이 있는데, 풍석암은 서유구가 젊었을 때 사용한 서재 이름이다. 서유구가 호로 사용한 ‘楓石’과 서재인 ‘楓石庵’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의 중부 서형수(徐瀅修)가 쓴 「풍석암장서기(楓石庵藏書記)」에 상세하다.
종자(從子) 유구(有榘)가 거처하는 용주(溶洲)는 반듯한 정원에 돌을 쌓아 계단을 놓고 그 위에 단풍나무 10여 그루로 아름다운 장막을 이룬 곳이다. 계단 아래에는 몇 이랑의 차밭이 고랑과 이랑을 서로 교차하고 있다. 계단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안채를 등지고 서재를 지었으니, 그윽하고 맑은 분위기에 거문고와 서책으로 기둥을 괸 곳이다. ‘풍석암(楓石庵)’이라 편액한 것은 그 곳의 실경(實景)과 고사(古事)를 기록한 것이니, 그 고사는 이렇다.


빈사국(頻斯國)에는 예닐곱 리 되는 단풍 숲이 있는데, 숲 동쪽에 석실(石室)이 있고, 돌이 잇닿아 문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위에 죽간(竹簡) 전문(篆文)이 새겨져 있으니, 전해 오기를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든 곳이라 한다. 그 말이 허황되어 유자(儒者)들이 믿을 바는 아니지만, 믿을 수 없고 또한 알 수도 없는 일이다. 대개 글을 만든 것이 창힐로부터라는 것을 또한 누가 보고 누가 전할 수 있었겠는가? 또 창힐이란 인물이 실제로 있었겠는가, 없었겠는가? 있었다면 모두 있었던 일이겠거니와 없었다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될 것이니, 어찌 유독 “풍석”에 대해서만 의심을 하겠는가? 그러니 오늘날의 서적은 모두 창힐이 남긴 것이 되는 것이다.


유구의 집안은 본래 가난하여 소장한 서적이 한 상자를 채우지 못하였는데, 날로 달로 박학상설(博學詳說)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서적 수집에 힘써, 비록 곽영(郭永)의 돈과 주앙(朱昂)의 녹봉이 없었어도 조금씩 모아 사부(四部)가 대략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에 서가로 높이고 집을 지어 받쳐 놓으니 꿰어놓은 구슬같이 맑고 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또 아침저녁으로 그 안에 있으며 노력하여 다른 일이 없었으니, 그의 뜻이 폐해지지 않았음을 알겠다. 무릇 글자를 만든 것은 공(功)이 만세에 전해지고 서적을 소장하는 것은 공이 한 집안에 미친다. 비록 크기가 같지는 않지만 그 공은 한가지이다. 또한 모르겠다. 이 서재에 서적을 소장함이 유구하게 사라지지 않음이 단풍 숲의 죽간과 같이 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여 그 일을 전하는 것이 또한 창힐이 글자를 만든 것과 같지 않겠는가? 사람과 글자가 전해지고 전해지지 않음은 오히려 모르겠으니, 하물며 이 암자에 있어서랴, 楓石에 있어서랴? 이를 남겨두어 영위장인(靈威丈人)에게 가져가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이것으로 기(記)를 삼는다.

徐瀅修, 「楓石庵藏書記」, 『明皐全集』 卷8, “從子有榘之居溶洲也, 方畒爲庭, 築石爲階, 階上楓樹十餘株, 簇立錦帳. 階下荼圃數頃, 交錯溝塍, 去階五六步, 負軒爲庵, 窈深潔淨, 琹書搘柱, 顔曰楓石庵, 紀實也, 且志古也. 志曰, 頻斯國有楓林六七里, 樹東有石室, 緝石爲牀, 牀上有竹簡篆文. 舊傳蒼頡造書處, 其言吊詭, 儒者不之信. 然其不可信, 亦不可知. 夫書之造自蒼頡, 且孰見而孰傳之, 蒼頡其有人乎, 無人乎? 有則皆有, 無則皆無, 何獨至於楓石而疑之? 今之書籍, 皆蒼頡之遺也. 有榘家故貧, 所蓄書不滿一簏, 及其博學詳說, 稍有日月, 乃力蓄書不輟, 雖無郭永之錢, 朱昂之俸, 而銖積寸累, 四部幾畧備矣. 於是丌以尊之, 庵以閣之, 落落如連珠, 粲粲如列宿. 又能晨夕其中, 吃吃無外事, 吾知其志之不容廢也. 夫造書者, 功流萬世, 蓄書者, 功被一家, 雖小大不同, 爲功一也. 抑不知是書之藏是庵, 其悠久不替也, 有若楓林之竹簡乎. 人之愛其人而傳其事, 又若蒼頡之造書乎? 人與書之傳不傳, 尙不能知, 而况於庵乎, 况於楓石乎? 姑存此, 留與靈威丈人竊之可也, 是爲記.”
풍석암서실(楓石庵書屋) 원고지와 필사본
용주(溶洲)는 부용강(芙蓉江) 가로 지금의 용산 부근이다. 서유구는 당시 조부인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을 모시고 있었는데, 서명응과 중부인 명고明皐) 서형ᄉᆃ(徐瀅修, 1749-1824에게 당송8대가 및 「단궁(檀弓)」·「고공기(考工記)」를 배웠고, 우산(愚山) 이의준(李義駿, 1738-1798)에게 명물학(名物學)과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이 시기에 서유구는 학문에 매진하며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를 만들어 직접 구할 수 없었던 서적을 필사하여 소장하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책으로는, 『금세설(今世說)』(고려대도서관 소장), 『왕무공집(王無功集)』, 『주역구결의(周易口訣義)』(이상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이상 오사카부립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행포지(杏蒲志)』(UC Berkeley 동아시아도서관,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화봉문고 소장) 등이 있다.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행포지』는 권1-3이 UC Berkeley 동아시아도서관, 권4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권5-6이 화봉문고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행포지』는 권1-4부분만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행포지』의 각 권 구성은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의 그것과 다르다. 또한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이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의 수정본이기는 하지만,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은 권1-4 부분만 있는데다 그림 등이 빠져있는 불완전한 형태이다. 한편, 홍콩과학기술대에 『행포지』 권4 필사본이 전하고 있는데, 권 구성과 내용은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와 같으나 필사된 원고지는 이와 다르다. 이 필사본은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 필사본보다 이전 형태의 것으로 보인다.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책에는 당대 청대 시문과 청대 고증학 등 청대 학술의 학습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있다. 이 중 『금세설』은 왕탁(王晫)의 필기(筆記)이고, 『왕무공집』은 당나라 왕적(王績)의 시문과 청나라 고증학자 손승연(孫星衍)의 글을 필사한 책이며 『주역구결의』는 당의 사징(史徵) 저술을 손성연이 다시 교정하여 간행한 책이다. 이러한 책들은 청나라 시문과 경전을 학습하던 용주 시절에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책은 당대 청대 시문과 청대 고증학 등 청대 학술의 학습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많다.
‘楓石庵書屋’ 版心題 原稿紙 『今世說』(고려대 도서관 소장)
자연경실기(自然經室記)
서유구는 1806년에 정계에서 쫓겨나 1823년 복귀할 때까지 금화(金華), 대호(帶湖), 난호(蘭湖)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리고 정계에서 은퇴할 때 쯤인 1837년 번계(樊溪)에 살 곳을 정하고 자연경실(自然經室)을 꾸몄다. 자연경실은 서유구의 젊은 시절 서재인 풍석암을 이은 것으로, 8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여 당시에 장서가 많은 것으로 유명했다. ‘자연경실’의 명명 유래에 대해서는 서유구가 직접 지은 「자연경실기(自然經室記)」에 상세히 나와 있다.
번계(樊溪)의 동쪽, 담장에 가려진 집이 있어 창문이 있고 이중의 벽으로 되어 있어 고요하기가 감실(龕室) 같은데, 풍석자(楓石子)가 기거하며 독서하는 곳이다. 집이 몇 간 안 되어 책상자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 가운데에는 작은 걸상이 놓여있고, 뒤에는 문목병(文木屛)이 있다. 병풍의 높이는 3척쯤 되며, 거기 그림에는 주름진 봉우리가 솟아 있고 얕은 연못이 아래에 있다. 연못에는 원앙이 두 마리 있는데, 한 마리는 물에 떠 있고 한 마리는 물결을 차고 있으며, 부리와 깃털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킬 수 있을 정도다. 걸상 모서리에는 납화(蠟花) 두 병이 놓여 있다. 벼루・안석・골동 솥, 술잔 따위를 얼추 갖추어 둔 것은 그저 서권(書卷)의 풍취를 돕고자 해서 일 따름이오, 모두 갖추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벼루・안석・골동 솥, 술잔 따위도 서권과 같다. 이에 지지(地志)에서 “소실산(少室山)에 자연경서(自然經書)가 있다”고 한 말을 취하여 문설주에 자연경실(自然經室)이라 써 붙였다.


객 가운데 그 뜻을 묻는 자가 있어, 말하였다. “아, (자연경실이란 말은) 허언(虛言)이군.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 기(記)를 지어 사실로 굳히지 않는가?” 풍석자가 말했다. “나는 이미 기를 지었는데, 그대는 못 보았나?” 객이 말했다. “못 봤소.” 풍석자가 병풍・걸상・병화・골동품 등 앞에 잡다하게 놓여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것이 내 기요.” 객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무슨 말이오?” 하였다. 풍석자가 말했다. “그대가 내 방에 들어올 때 문목병을 보고는 어떠했소?” “교묘하더군요, 처음엔 인공(人工)이라 의심했소.” “병화(甁花)는 어땠소?” “역시 교묘하더군요, 처음엔 천공(天工)이라 의심했소.” 풍석자가 말했다. “문목(文木)을 인공이라 여긴 것은 천공이 이렇게 교묘할 줄 미처 생각지 못해서요. 병화를 천공이라 여긴 것은 인공이 이렇게 교묘할 줄 미처 생각지 못해서이오. 하늘의 교묘함이 승하다 하겠소, 사람의 교묘함이 승하다 하겠소? 하늘의 공교함과 사람이 공교함이 서로 승하니,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저 죽간칠서(竹簡漆書)를 하늘이 유독 못 만들까?


북방 사람이 닭은 습관적으로 봤으나 꿩은 한 번도 못 봤는데, 하루는 남방으로 가서 꿩을 보고는 시간을 고하기를 기대하였으니, 이는 습관에 눈이 먼 것이다. 그러므로 문목(文木)을 인공이라 여기는 것은 사람이 그린 그림에 눈 먼 것이고, 병화를 천공이라 여기는 것은 천화(天畵)에 눈 먼 것이다. 자연경(自然經)을 허언(虛言)이라 여기는 것은 그대가 익숙히 보아온 성작현술지경(聖作賢述之經)에 눈 먼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의 먼 눈을 씻고 그대의 가리워진 것을 걷어내고 그대의 형체를 버리고 총명을 토해내어 소실산(少室山)에서 노닐며 그 책을 펼치고 그 글을 읽으며 장차 웃으며 정신이 노닐게 하지 않는가? 또한 그대가 문목을 인공이라고 의심한 것은 조각하고 그린 것이 그림같아서일 뿐이다. 그러나 그림에 또한 비슷하게 하는 대상이 있으니, 그림에서 비슷하게 하려는 대상은 곧 참이다. 앞서 말한 주름진 봉우리와 원앙의 참 모습은 과연 누가 조각하고 누가 그린 것인가? 그렇거늘 그대는 의심하지 않고, 문목이 꼭 닮은 것을 한 번 보고는, 흘끗흘끗 보고는 모두 신묘하다 여겼다. 심하구나, 미혹됨이여. 지금 육경의 문도 성인이 만물의 정을 잘 그려낸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육경을 도화로, 만물을 원앙새로, 자연경을 문목병으로 삼고, 다시 내 말을 돌이켜 보아 장차 흡족히 마음에 맞게 하지를 않는가?”


내가 듣기에 경(經)은 말을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말은 뜻을 의지하고 뜻은 마음을 의지하며 마음은 도(道)를 의지한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곳이 곧 경이 있는 곳이다. 도는 분분하여 하지 않는 것이 없고 조밀하여 깃들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기와·벽돌에도 있으며 똥·오줌에도 있으니 하물며 벼루·안석·골동 솥, 술잔 등에 있어서랴. 그대도 벼루·안석·골동 솥, 술잔에서 구한다면, 장차 記를 기다리지 않아도 앎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 이름이니, 자연지기(自然之記)라 이른다.

徐有榘, 「自然經室記」, 『金華知非集』 卷5, “樊溪之左, 有屋隱於廧, 交牕複壁, 窈乎若龕, 楓石子之所居而讀書也. 屋之深, 未數楹, 而卷局緗袟, 占其半焉. 正中鋪小榻, 背設文木之屛, 屛高三尺餘, 皴峰隆起, 淺潭下匯. 中有鸂鶒二, 一泛一掠波, 其咮觜羽爪, 可辨而指也. 隅榻而置蠟花二甁. 它硏几鼎彛之屬略具. 聊以助書卷之趣而已. 不求備也, 則硏几鼎彛, 亦猶之書卷也. 於是, 取地志所謂‘少室山有自然經書’之語, 榜諸楣曰, 自然經室. 客有詢其義者曰, ‘噫, 其虛言與! 雖然, 盍記以實之?’ 楓石子曰, ‘吾固已有記, 子未見邪?’ 客曰, ‘未見也.’ 楓石子指屛榻甁花硏彛之雜陳於前者曰, ‘此吾記也.’ 客瞠曰, ‘何謂也?’ 楓石子曰, ‘子之入吾室也, 見吾文木之屛, 奚若?’ 曰, ‘巧哉! 始吾疑爲人工矣.’ 楓石子曰, ‘見吾甁花, 奚若?’ 曰, ‘亦巧哉! 始吾疑爲天工矣.’ 楓石子曰, ‘謂文木人工者, 不意天工之若是巧也. 謂甁花天工者, 不意人工之若是巧也. 將謂天之巧勝乎, 將謂人之巧勝乎? 天與人交相勝也, 則彼竹簡漆書之成於人者, 天獨不能爲乎? 北方之人, 慣雞而未見鷩. 一日南行, 見鷩焉而求時夜者, 瞖於慣也. 故謂文木人工者, 人畵爲之瞖也. 謂甁花天工者, 天畵爲之瞖也. 謂自然之經虛言者, 子所慣聖作賢述之經爲之瞖也. 子何不刮子之瞖, 去子之蔽, 墮子形軆, 吐子聰明, 以遊乎少室之山, 而披其袟, 讀其文焉, 將無迺囅然而釋於神邪? 且子之疑乎文木者, 以其雕鏤點綴之似畵耳. 然畵又有所似, 畵之所似者, 眞也. 向所謂皴峰鸂鶒之眞者, 果孰雕鏤之? 孰點綴之? 而子曾是之不疑. 一見夫文木之肖其形, 則迺覰覰然該以爲神. 甚矣, 其惑也! 今夫六經之文, 亦聖人所以善畵萬物之情者也. 子何不以六經爲圖畵, 以萬物爲鸂鶒, 以自然之經爲文木之屛, 而反觀于吾言, 將無乃犁然而契於心耶?’ 蓋吾嘗聞之, 經者待言而成者也. 言待於意, 意待於心, 心待於道. 故道之所在, 卽經之所在也. 道之爲物也, 紛乎其無不爲也, 密乎其無不寄也. 在於瓦甓, 在於屎溺, 而况乎硏几鼎彛之屬邪? 子又求諸硏几鼎彛, 則將有不待記而知者. 是其名也, 謂之自然之記.”
자연경실(自然經室) 원고지와 필사본
서유구는 『수경주(水經注)』에 나오는 ‘자연경(自然經)’의 용어를 자신의 서재 이름으로 가져와, 자연 속에서 참된 것을 찾고자하는 인식태도를 보여주었다.

서유구는 자연경실을 꾸민 뒤,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를 만들어 자신의 저작 및 주변 인물들의 저작을 정리하였다. 이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를 계속 사용하였다. 풍석암서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책 중 1822년 서유본(徐有本, 1762-1822) 사후에 정리되었을 『좌소산인문집(左蘇山人文集)』, 1825년에 완성된 『행포지(杏蒲志)』, 그리고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도 섞여있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등이 그것이다.
‘楓石庵書屋’ 版心題 原稿紙 『杏蒲志』(UC Berkeley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타인의 저술이 서유구의 학습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자료라면,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된 타인의 저술은 서유구의 ‘叢書’ 편찬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는 洪吉周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유구는 홍길주의 『睡餘放筆』과 『睡餘演筆』을 自然經室藏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하여 정리하였고, 이를 叢書 작업에 넣고자 하는 뜻도 보였다. 이 필사본은 현재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유구는 고려시대 저술부터 당대 박지원, 정약용, 정학연 등의 저술까지 폭넓은 시대와 매우 다양한 방면의 저술들을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정리하였다.
自然經室藏 版心題 原稿紙 『補閑集』(UC Berkeley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또한 서유구는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 판심제 원고지에 정리하였던 자신의 저술을 수정, 증보하면서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로 재정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정리된 서유구의 저술은 서유구 학문의 완성단계를 보여주는 저술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포지(杏蒲志)』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다.
自然經室藏 版心題 原稿紙 『杏蒲志』(大阪府立中之島圖書館 소장)
서유구는 『행포지』의 권 차 등을 수정하면서 그 수정된 사항을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새로 정리하여, 그 저술의 편찬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저작물들은 서유구 저작을 종합적, 체계적으로 고찰하는 데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그리고 서유구는 서명응부터 이어지는 박학의 학풍에 힘입어 자신의 저술과 경험, 그리고 당대까지의 국내외 정보를 치밀하게 조직하여 필생의 역작인 거질의 『임원경제지』를 찬술하였다.

『임원경제지』의 대표적인 필사본으로는 고려대 도서관 필사본, 일본의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필사본이 있다. 이 중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필사본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에 필사되어 있고 16개 지(志)의 서문에 해당하는 인(引)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 장점이 있으나, 완성본은 아니다.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 도서관 소장 『임원경제지』와 미국 버클리대 아사미문고 소장 『섬용지(贍用志)』는 완성본이 아닌 곳곳에 수정표시가 가해져 있는 초고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일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 『임원경제지』에는 『섬용지』 권1-2 부분이 낙질인데, 미국 버클리대 소장 『섬용지』가 바로 권1-2 부분이다. 형태가 같은 것으로 보아 본래 초고본 한 질이었을 것이다. 가필(加筆)하여 수정한 것과 간지를 붙여 내용을 추가한 것, 그리고 한 세조(細條)인 문단 전체를 삭제한 곳도 보인다. 이 초고본의 수정표시가 반영된 완성본이 고려대 도서관 필사본이다. 그러나 고려대 도서관 필사본은 자연경실장 판심제 원고지 형태를 가지고는 있으나, 이는 고려대 도서관에서 똑같은 형태로 등초한 필사본으로 완성된 원본은 아니다.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필사본의 수정사항을 반영한 원본은 서유구 후손가에 소장되었던 것을 고려대 도서관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필사한 것이다. 현재 그 정본의 소재는 알 수 없다.
서유구의 ‘자연경실’에 소장되었던 장서 대부분은 사토 로쿠세키(佐藤六石, 1864-1927) 수집본이 있는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과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 수집본이 있는 UC Berkeley에 있다.

한민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