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집중연구 > 고서

동아시아에서의 ‘천자문(千字文)’류의 유행과 속찬

가+ 가-

한자한문 교재 『천자문』
동양 삼국에서 가장 널리 활용된 한자한문 교재는 『천자문』이다.『천자문』은 전고(典故)가 어렵지만, 형식면에서는 4언 고시 형식을 취하면서, 대장(對仗), 압운(押韻), 연면자(連綿字)를 활용하고 일정 주제마다 단락을 이루도록 하여 한자한문 공부에 매우 유용하다. 또한 해서(楷書), 초서(草書), 전서(篆書)로 필사되거나 합본되어 서체의 교본으로 이용되어 왔다.
한국에서는 ‘천(天)’에서 ‘호(乎)’에 이르는 『천자문』 1천 자를 서수(序數)로도 활용하였다. 즉, 조선시대 군자감(軍資監)이나 풍저창(豐儲倉)에서는 창고의 표호(標號)로 그 1천 자를 사용하였다. 경복궁의 곳집도 『천자문』의 글자를 서수로 활용해서 ‘〇字庫’라고 이름 붙였다. 과장(科場)에서는 시권(試券)들을 한 축씩 수합하면서 천자문 순서를 매기고, 같은 축 안에서는 천자(天字) 일호(一號), 이호(二號)와 같은 식으로 정리했다. 전지(田地)의 자호(字號)도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붙였다. 그만큼 『천자문』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긴요하게 이용되었다.
『천자문』의 성립
『천자문』은 양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서(梁書)』 「주흥사전(周興嗣傳)」에 의하면 “양나라 고조가 삼교(三橋)의 구택(舊宅)을 광택사(光宅寺)로 만들고 주흥사 및 육수(陸倕)에게 광택사 비문을 짓게 했는데, 비문이 다 이루어져서 아뢰자 고조는 주흥사가 지은 비문을 채택했다. 이후 동표명(銅表銘)ㆍ책당갈(柵塘碣)ㆍ북벌격(北伐檄)을 주흥사로 하여금 왕희지(王羲之)가 쓴 글자를 이용하여 1천 자를 차운(次韻)하여 만들게 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주흥사의 ‘천자문’은 『차운왕희지서천자(次韻王羲之書千字)』라고도 부른다.
여기서‘차운’은 후대의 차운과는 달리‘운에 따라 정리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차운’의 의미를 오해하여 주흥사가 종요(鍾繇, 151~230)의 『천자문』을 개작한 것이라는 설도 나왔으나 신빙성이 없다. 단, 『양서(梁書)』 「소자범전(蕭子範傳)」에는 “자범에게 대사마남평왕호조속종사중랑(大司馬南平王戶曺屬從事中郞)을 제수하고 천자문을 만들게 했는데, 그 문사가 매우 아름다워서 기실(記室) 채원(蔡遠)에게 명하여 주석(注釋)을 내게 했다.”고 되어 있어, 주흥사의 『천자문』 이외에도 소자범의 『천자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청나라 초 고염무(顧炎武)와 조선후기 이규경(李圭景)의 변증이 있다.
『천자문』의 성립에 관해 여러 이설이 있지만, 후대에 널리 알려진 것은 주흥사의 『천자문』이다. 이것은 수(隋)나라 지영(智永)과 당나라 회소(懷素)에 의해 널리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왕희지의 7대손이라고 하는 지영은 800본의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을 이루어 절동(浙東)의 각 사찰에 보내었다고 한다. 한편 회소는 『천자문』을 초서로 적어, 『천자문』을 서체의 교본으로 확립했다. 그의 뒤를 이어 송나라 선의대사(宣義大師) 몽영(夢瑛)은 전서(篆書)로 『천자문』을 이루었다. 그리고 원나라 조맹부(趙孟頫)는 해서·초서·전서·예서로 『천자문』을 써서, 그것들이 모두 세상에 전했다.
주흥사의 『천자문』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字)했으므로 언어문자생활에서 빈도수가 높은 글자가 더러 빠져 있다. 이를테면 ‘일(一)’부터 ‘십(十)’까지의 숫자를 전부 갖추지 않았고, 동서남북에서 ‘북’을 빠뜨렸다. 또한 1천 글자를 전부 다른 글자를 사용하려 했으나, 조선후기의 홍경모(洪敬謨)가 지적했듯이 조맹부의 해서‧행서 천자문에는 ‘女慕貞潔’과 ‘紈扇圓潔’의 구절에서 ‘潔(결)’ 자가 중복되어 있다. 조선의 『신간천자주석(新刊千字註釋)』(嘉靖丙寅=1566誌 淳昌無量寺板刻)은 ‘女慕貞絜’과 ‘紈扇圓絜’로 되어 있다. 단,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과 숙종어제서문(肅宗御題序文) 목판본은 ‘女慕貞烈’과 ‘紈扇圓潔’로 되어 있다.
『천자문』은 4자구 총 250구를 의미구성과 압운방식에 따라 8개의 단락으로 편성했다. 즉, 천지성신(天地星辰)에서 시작하여 자연환경을 노래한 후, 인간의 삶 자체를 일정한 주제에 따라 단락을 나누어 다루는 식으로 일정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단, 제1단락은 50구나 될 정도로 길고, 그 세부는 3절로 이루어져 있다. 제2단락도 2절, 제4단락도 3절, 제7단락도 2절로 이루어져 있되, 그 각각의 길이는 제1단락보다 짧다. 『천자문』은 4자구 단독 의미보다 8자구의 절로 의미를 전달하며, 8자마다 압운을 하여 격구대(隔句韻)의 형태를 취했다. 압운은 환운(換韻) 방식을 택하였다. 오가와 다마키(小川環樹)가 『광운(廣韻)』에 따라 그 압운방식을 고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한편 『천자문』의 형식을 본뜬 속찬본도 많이 나왔다. 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의 『범어천자문(梵語千字文)』, 송나라 전석우(田錫雨)의 『속천자문(續千字文)』(『천자문』에 빠진 글자들을 대강 엮음), 황조전(黃祖顓)의 『별본천자문(別本千字文)』(『천자문』 이외의 글자들로 평이한 내용을 서술), 『광천자문(廣千字文)』, 송나라 호인(胡寅)의 『서고천문(敍古千文)』(상고시대부터 송대까지의 역사를 천자문 형식으로 강술한 책), 원나라 하태화(夏太和)의 『성리천자문(性理千字文)』, 명나라 탁인월(卓人月)의 『천자대인송(千字大人頌)』, 여재지(呂裁之)의 『여씨천자문(呂氏千字文)』, 명나라 주이정(周履靖)의 『역천자문(易千字文)』(『천자문』의 글자를 재배열), 청나라 오성란(吳省蘭)의 『공경황상칠순만수천자문(恭慶皇上七旬萬壽千字文)』, 『어제천자조(御製千字詔)』 등이 그것들이다. 조선후기의 이규경은 「천자문변증설(千字文辨證說)」에서 일부 『천자문』 속찬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호평하였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때부터 『천자문』에 대한 주석서들이 이루어졌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소자운(蕭子雲) 주본(注本)과 호숙(胡肅) 주본(注本)이 저록되어 있다.
『천자문』의 형식을 본뜬 속찬본
한편 『천자문』의 형식을 본뜬 속찬본도 많이 나왔다. 당나라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의 『범어천자문(梵語千字文)』, 송나라 전석우(田錫雨)의 『속천자문(續千字文)』(『천자문』에 빠진 글자들을 대강 엮음), 황조전(黃祖顓)의 『별본천자문(別本千字文)』(『천자문』 이외의 글자들로 평이한 내용을 서술), 『광천자문(廣千字文)』, 송나라 호인(胡寅)의 『서고천문(敍古千文)』(상고시대부터 송대까지의 역사를 천자문 형식으로 강술한 책), 원나라 하태화(夏太和)의 『성리천자문(性理千字文)』, 명나라 탁인월(卓人月)의 『천자대인송(千字大人頌)』, 여재지(呂裁之)의 『여씨천자문(呂氏千字文)』, 명나라 주이정(周履靖)의 『역천자문(易千字文)』(『천자문』의 글자를 재배열), 청나라 오성란(吳省蘭)의 『공경황상칠순만수천자문(恭慶皇上七旬萬壽千字文)』, 『어제천자조(御製千字詔)』 등이 그것들이다. 조선후기의 이규경은 「천자문변증설(千字文辨證說)」에서 일부 『천자문』 속찬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호평하였다.
치당(致堂) 호선생(胡先生: 송나라 호인을 가리킴)이 서문을 지은 『고천자문(古千字文)』에 대하여 주자(朱子)는 “족히 어린이에게 바름을 양성시킬 수 있다.” 하였으니, 어찌 주흥사가 편찬한 천자문과 같이 취급할 수 있겠는가? 청나라 왕사진(王士禛)의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옛사람이 따로 천자문을 편차하려 하였으나 이를 힐난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비(枇)ㆍ파(杷) 2글자를 어떻게 쪼개쓸 수 있느냐?’ 하므로 마침내 중지하였다. 내가 일찍이 무림(武林)의 탁가월인월(卓珂月人月)이 숭정 초년에 지은 「천자대인송(千字大人頌)」을 보니, 매우 사리(思理)가 있었다. 비(枇)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울창주(鬱鬯酒) 단지는 황금이요 반찬 주걱은 흰 나무[素木]이다.’ 하였으니, 비(枇)의 음은 비(匕)요 뜻은 제사에 쓰는 흰 주걱을 말한 것이다. 파(杷)자에 대해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길쌈을 맡고 남편과 자식은 써레를 잡았다.’ 하였으니, 써레는 논을 고르는 기구이다.” 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서하(西河) 모기령(毛奇齡)의 문인인 왕석(王錫)이 천자를 뒤집어 편차하여 서하의 뇌사(誄詞)를 지었고, 청나라 오성란(吳省蘭)의 『주어고존(奏御稿存)』에 “황상(淸 高宗)의 칠순만수를 공경히 축하한다.”는 천자문도, 주흥사가 편집한 책에서 거듭 인용한 것이다.
일본의 천자문 수용과 활용
일본은 한국을 통해서 『천자문』을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일본의 응신(應神)천황 15년(284), 백제(百濟: 구다라)의 소고왕(昭古王)[『일본서기』에는 阿花王. 또 貴須王ㆍ久素王]은 신하 아직기(阿直岐: 아치키)[『고사기』에 阿知吉師]를 시켜서, 암수 두 필의 말을 헌상했다. 아직기는 학문에 밝았으므로, 황태자 우지노 와키이랏코(菟道稚郞子)가 그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당시 왕인은 『논어』 10권과 『천자문』을 올렸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주흥사는 왕인보다 220여 년 뒤의 인물이므로, 왕인이 주흥사의 『천자문』을 지참했을 리 없다. 웅략(雄略)천황 이전의 ‘기기(記紀)’기록에는 600년을 높이 올려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자는 일본의 『고사기』에서 말한 ‘천자문’은 몽학독본의 범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고사기』 이전에 당나라 때 이미 승려 의정의 『범어천자문』이 불교입문 교본으로 활용되었다. 이 『범어천자문』의 수용과 함께 일본에서는 천자문이란 명칭이 널리 알려졌고, 왕인이 가지고 간 몽학독본을 『천자문』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왕인이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지만, 일본이 한국을 통해 『천자문』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이후 일본에서는 한자를 습득할 때 『천자문』을 크게 활용했던 듯하다. 8세기의 일본 습서목간(習書木簡)에 『논어』와 『천자문』을 공부한 것이 남아 있다. 즉, 『천자문』의 ‘散慮逍遙’라는 구를 쓴 목간, ‘天地玄黃宇宙洪荒日月’을 쓴 목간 등이 발굴되어 있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는 초학자들이 이한(李澣)의 『몽구(蒙求)』, 이교(李嶠)의 『백입영(百廿詠)』과 함께 주흥사의 『천자문』을 공부했다. 헤이안 시대 미요시노 다메야스(三善爲康, 1049~1139)는 『속천자문(續千字文)』을 속찬했다. 그 뒤 에도시대에는 가이바라 에키겐(貝原益軒, 1630~1714)의 『천자유합(千字類合)』과 편자미상의 『세화천자문(世話千字文)』이 속찬되었다. 『세화천자문』은 4언 3구가 의미 단위를 이루도록 하였고, 일본 한자어도 다용하였으며, 음독과 훈독을 혼합하는 독법을 채용하였다.
한국의 천자문 유통
한국의 경우, 앞서의 『고사기(古事記)』 「응신기(應神記)」를 그대로 믿는다면,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 재위) 이전에 『천자문』이 유행했어야 한다. 하지만 『고사기』 기록이 8백 년의 차이를 두고 있다면 『천자문』이 한국에 유통된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의 일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 초에 『천자문』이 유통된 상황은 문헌의 부족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충목왕(忠穆王)이 『천자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고려사』 권125 「신예열전(辛裔列傳)」). 해인사장판 고려대장경은 그것을 보관하는 함의 순서가 『천자문』을 이용하여 정리되어 있다. 고려말 이곡(李穀)은 「有元故亞中大夫河南府路摠管兼本路諸軍奧魯摠管管內勸農事知河防事贈集賢直學士輕車都尉高陽侯諡正惠韓公行狀」에서, 한영(韓永)이 천력(天曆) 원년(1328) 하서농북도첨렴방사사(河西隴北道僉廉訪司事)로 있으면서 객사한 시신 570여구를 안치하고 『천자문』의 글자 순서로 그들의 성명과 관향을 표시해 두었다고 한다(李穀, 『稼亭集』 卷12 行狀).
한국에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천자문』은 고려 말 판본으로, 이것은 지영(智永)의 글씨를 원나라 때 탁본한 것을 저본으로 삼았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초에는 이 지영 『천자문』과 조맹부(송설)의 『천자문』이 많이 보급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조 5년 즉 1459년의 음력 6월 24일(갑술)에 조맹부의 『진초천자문』을 바치는 사람에게 상을 주도록 명령했다. 세조 13년 즉 1467년의 음력 8월 14일(정미)에는 태평관에 투숙한 유구국 사신에게 조맹부의 『진초천자문』을 하사했다. 세종 말, 단종 초에는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에 뛰어난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도 『진초천자문』을 서사(書寫)했다. 1990년대에 안평대군의 『진초천자문』 석판본이 발견되었다. 이보다 앞서 세종 7년인 1425년에는 경상도 관찰사 하연(ㅍ)이 판각하여 인쇄해서 올린 『전서천자문(篆書千字文)』과 『대천자문(大千字文)』을 성균관, 교서관 등에 반사했다. 지영과 조맹부의 『천자문』 이후, 김인후(金麟厚)의 초서천자문, 한호(韓濩)의 초서 천자문과 해서 천자문, 삼체 천자문, 1838년 송내희(宋來熙) 서(敍) 『김두영서 전천자(金斗榮書 篆千字)』 등이 서사 교본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한국의 천자문 판본
한국에서 간행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하버드-옌칭 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에 소장되어 있는 『천자문』 목판본으로, 1566년(명종 21) 순창(淳昌)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최준(崔峻)이 쓴 발문이 붙은 『신간천자주석(新刊千字註釋)』이다. 권수에 ‘新刊千字註釋卷之上’이라 했으나, 불분권 단권이다. 성점(聲點)은 없으며, 주석에서 인용서명을 묵개자(墨蓋字)를 이용해서 밝혔다. 양나라 이섬(李暹)의 주를 토대로 증주(增註)한 중국본을 저본으로 사용한 듯하다. 주(註)는 쌍행(雙行)으로, 본래 단구(斷句)되어 있지 않은데, 일본인 소장자가 오쿠리가나를 붙였다. 단구도 일본인의 손에 의한 듯하다. 이후 1575년(선조 8) 전라도 광주에서 한글 새김과 자음을 지닌 『천자문』이 간행되었다. 간기(刊記)에 ‘萬曆三年月日光州刊上’이라고 되어 있어 선조 8년(1575) 간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현재 일본 동경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각 한자에 대해 문맥과는 상관없이 그 한자의 대표적인 석음만 표기했다.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 도서관 소장 목판본 『新刊千字註釋』 卷之上 1a-b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 도서관 소장 목판본 『新刊千字註釋』 崔峻 誌
1583년(선조 16) 정월, 중앙에서 한호(1543~1605)의 해서체 글씨를 저본으로 『석봉천자문』을 간행하면서 한 글자마다 한글 석음을 하나만 표기하였으며, 상성과 거성에 성조는 표시하였다. 『석봉천자문』은 이후 왕실, 관아, 사찰, 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유포되었다. 1597년(선조 30)에는 초서체로 본문을 새긴 『초천자문(草千字文)』이 나왔다. 그리고 1691년(숙종 17)에는 『석봉선자문』에 국왕 숙종의 서문을 붙인 해서체의 『어제천자문(御製千字文)』이 나왔다.
⒜ 1583년(선조 16) 정월 『석봉천자문』 原刊本(일본 國立公文書館 소장) : 상성과 거성에 성조 표시.
⒝ 1601년(신축, 선조34) 개간본 : (아래 『어제천자문』의 권말 刊記에서 추정)
⒞ 1691년(숙종 17) 『어제천자문』 : 상성과 거성에 성조 표시
⒟ 1710년(숙종 36) 『어제천자문』 : 성조 표시
⒠ 일본 早稻田大學 소장 일본 복각본 『석봉천자문』 : 1710년(숙종 36)판본을 저본으로 하되 숙종 어제 서문과 성점 제거.
석봉천자문』(선조 16년본 및 숙종어제 천자문)은 글자의 성조를 표시하되, 상성과 거성에만 환점(圜點)을 쳤다. 그 성조 표시는 평수운과 대부분 일치하지만, 일치하지 않거나 문맥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28연의 ‘空谷傳聲, 虛堂習聽’(빈 골짜기에 소리가 울려 전하고, 허공에 소리가 울려 그것을 듣고 배운다//사람의 선행과 덕행은 빈 골짜기와 빈 방에 소리가 울리듯이 신속하다)에서 ‘청(聽)’은 시운(詩韻)으로는 평성 청운(靑韻)과 거성 경운(徑韻)의 2음인데, 문맥상으로는 평성이 옳다. 거성이면 ‘함부로 하도록 내맡긴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 글자는 거성의 압운자이어야 하므로 『석봉천자문』은 거성으로 표시하였다.
동경대학 오구라(小倉)본 『千字文』 卷首와 卷末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숙종 갑술년(1694) 重刊本 『御製千字文』 「御製千字文序」
<좌>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숙종 갑술년(1694) 重刊本 『御製千字文』 卷末
<우>고려대 중앙도서관 소장 숙종 신미년(1691) 重刊本 『御製千字文』 卷末
<좌>일본 國立公文書館 소장 『石峯千字文』 原刊本(1583) 卷末
<우>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 소장 숙종 경인년(1710) 重刊本의 복각본 『石峯千字文』 卷末
『석봉천자문』의 권발 표시 방식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사실은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인용된 일본인의 『효경』 범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정현(鄭玄)이 주(註)한 『효경』을 판각하다 보니 발성에 있어서 뜻이 다를 경우에도 으레 점을 찍었다. 그런데 근래에는 어린 선비들이 사성(四聲)을 읽는 법에 어두워서 도치되기도 했다. 이에 내가 새로운 생각을 내어 상성과 거성에는 점을 찍고, 뜻이 다를 경우에는 반점을 찍으려고 했는데, 근래에 조선에서 판각한 『언문천자문(諺文千字文)』을 보니 상성과 거성에 점을 찍기를 내가 새로 생각한 것과 같이 했으므로, 그에 따라 찍는 것으로 정했다. - 『해동역사』 권42 예문지1, ○경적1 본국서목 훈민정음, 일본인의 「효경범례」
이후 근세조선의 『천자문』 판본은 상성ㆍ거성ㆍ입성의 측성에 흑색의 권점을 표시하는 식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한편 1752년(영조 28)에는 홍성원(洪聖源, 1699~?)의 글씨로 『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이 간행되었다. 단, 홍성원의 주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字音 표기에서 『석봉천자문』과 차이가 있고 『삼운성휘(三韻聲彙)』 및 『전운옥편(全韻玉篇)』과 일치하는 경우가 더 많다. 중간본은 홍태운(洪泰運)이 다시 판하를 써서 1804년(순조 4) 광통방(廣通坊) 방각본(坊刻本)이 이루어졌다. 이 주해본은 『천자문』의 각 글자에 2~3개의 새김을 달았으며 간략한 주석과 함께 250구를 한문으로 풀이한 통해(通解)를 두었다. 전서체를 각 글자마다 우측에 제시했다. 각 글자마다 본구(本句)의 문의(文義)를 부연하고 별의(別義)를 제시했으며, 본의(本義)가 달리 있으면 뒤에 본(本)자를 써서 표시했다. 고사나 전고의 주해는 『신간천자주석』의 상주(詳註)보다 소략하다. 또한 사성을 권점으로 표시했는데, 권수에서 상성은 권(圈), 거성은 점(點)으로 표시하고 평성ㆍ입성은 표시하지 않는다고 했고, 한 가지 뜻에 두 가지 音이 있으면 그 하나만 주석을 한다고 범례를 밝혔다. 하지만 방각본의 경우 사성 표시는 일정한 체계를 따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1926년(大正 14) 영창서관 간행 『신석한일선문 삼체천자문(新釋漢日鮮文 三體千字文)』(해서, 초서, 행서의 3체 병렬 제시이나 1932년 한남서림 간행 『몽학도상 일선천자문(蒙學圖像 日鮮千字文)』, 1937년 덕흥서림 간행 『신석한일선문 주해천자문(新釋漢日鮮文 註解千字文)』이 나왔으나, 이것은 개원사 원간본이나 광통방 방각본의 『주해천자문』과 관련이 없다. 1937년 덕흥서림 간행 『신석한일선문 주해천자문』은 상단 난에 4언 1구의 뜻을 한글로 풀이해 두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는 『천자문』의 형태를 본뜬 천자문류가 등장하고 해방 이후까지 다양한 변용의 양상이 나타난다.
1810년 경 김용묵(金用黙, 생몰년 미상)은 역사 교육 겸 한문 교육용으로 『몽학사요(蒙學史要)』(歷代二千字)를 엮었다. 권두에 정원용(鄭元容)과 김학성(金學性, 1807~1875)의 서문이 있고 권미에 아들 김기찬(金基纘)이 1868년(高宗 5)에 쓴 발문이 있다. 주흥사 『천자문』의 4자 1구의 형식을 본뜨되, 2천 자를 집자(集字)하였다. ‘이천자문’계통은 근세에 많이 간행되었다. 회동서관 간행 이종린(李種麟) 저 『몽학이천자(蒙學二千字)』(1915년), 영창서관 간행 『신정체법일선이천자(新訂體法日鮮二千字)』(1926년), 신구서림 간행 김문연(金文演) 저 『훈몽일선이천자(訓蒙日鮮二千字)』(1926년), 대지사(大志社) 백길순(白吉順) 발행의 『사체이천자문(四體二千字文)』(단기4285, 1952년), 세창서관 신태삼(申泰三) 발행의 『세창이천자문(世昌二千字文)』(단기4289, 1956년) 등이 있다. 모두 압운을 고려하지 않았다. 한남서림 간행 『몽학도상일선천자문(蒙學圖像日鮮千字文)』은 글자마다 평성에 〇, 측성에 ●를 붙였다.
조선시대의 속찬본
조선시대에는 『천자문』의 형식을 비판한 새로운 체제의 속찬본도 나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의 『몽학의휘(蒙學義彙)』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아학편(兒學編)』이다. 『몽학의휘』는 정약전이 1804년(순조 4)에 정약용의 『이아술의(爾雅述意)』 8권을 토대로 1천여 자를 뽑아 주석을 붙인 것인데, 정약용의 서문만 전한다. 이후 정약용은 2천 글자를 가지고 성어를 구성하고 압운을 하여 『아학편』을 완성했다. 상권에는 형태 있는 물건의 글자를, 하권에는 물정(物情)과 사정(事情)의 글자를 수록하였다. 자서(自序)에서 정약용은 상대어와 동의어의 의미관계를 통해 아동에게 문자의 기본개념을 숙지시키고자 한다고 밝혀다. 정약용은 「천문평(千文評)」에서 『천자문』은 전고가 어려워 초학자으로 부적절할 뿐 아니라, 성어의 배열도 기능적 문자 학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 바 있다. 정약용은 한자 학습에서 촉류(觸類)와 방통(旁通)을 중시했기에 『천자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1813년에 정하건(鄭夏建)은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를 이루었다. 상권 947자, 하권 1,000자, 합 1,947자를 수록했으며, 매면 5행에 1행 5자씩 필사하였다.
『천자문』은 동양 삼국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한자한문 기초교육의 교재로 중시되었으며 운어(韻語) 습득 교재이기도 하였다. 또한 해서체는 물론 초서체와 전서체로 제작되어, 서체의 교본으로 이용되었다. 동아시아 삼국은 한자한문을 사용하여 공통의 담론화 양태를 구사하였다, 하지만 동아시아 문화는 구체적-시공간적 축에서 보면 완전히 공통의 역사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천자문』을 활용한 방식이나 속찬본의 구조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은 『천자문』을 두루 학습하다 보니, 『천자문』을 일상생활에서 매우 다양하게 활용했다. 『천자문』의 1천 글자를 서수로 널리 활용한 것은 그 두드러진 일례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천자문』을 평측 공부의 자료로서도 활용하기 위해 판각 때 성조를 표시하되, 한국한자음의 특성에 근거하여 평성과 입성을 제외한 상성과 거성만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천자문』의 형태를 본뜬 천자문류가 등장하고 해방 이후까지 다양한 변용의 양상이 나타났다. 김시습의 『천자여구(千字儷句)』, 홍희준의 『별천자문(別千字文)』, 홍경모의 「만세천문(萬世千文)」, 홍석모의 『경서집구천자문(經書集句千字文)』 등이 대표적이다. 정약용의 『아학편』과 같이 『천자문』의 형식을 비판한 새로운 체제의 속찬본도 나왔다.
일본도 중국의 『천자문』을 받아들이되, 각각 『세화천자문』과 같은 특이한 속찬본을 산출하였다. 왕인이 『천자문』을 일본에 전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 있지만, 일본이 한국을 통해 『천자문』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디. 이후 일본에서는 한자를 습득할 때 『천자문』을 크게 활용했던 듯하다.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 미요시노 다메야스(三善爲康)가 『속천자문』을 속찬했고, 그 뒤 에도시대에는 가이바라 에키겐(貝原益軒)의 『천자유합(千字類合)』과 편자미상의 『세화천자문(世話千字文)』이 속찬되었다.
참고문헌
강신항(2000), 『한국의 운서』, 태학사.
김세한(1981), 『조선조 초학 교재 연구』, 계명대학교한문연구회.
朴秉喆(2013), 「한국의 『四體千字文』과 일본의 『三體千字文』에 대하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제191회 전국학술대회 발표논문집, 광운대학교 한울관, 2013.3.16, pp.15~33.
박혜순(2009), 『韓國 『千子文』에 關한 考察 : 4種 『千子文』을 中心으로』, 전주대학교 한문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송병렬(2010), 「千字文類의 변용과 성격 고찰」, 『한문학논집』 30, 근역한문학회, pp.441~466.
신경철(1986), 「『역대천자문』연구」, 『국어국문학』 95, 국어국문학회, pp.37~62.
심경호(2013), 『한국한문기초학사』(3책), 태학사, 2012.10(1쇄), 2013.8(2쇄).
안미경(2004), 『천자문 간인본 연구』, 이회문화사.
이근우(2004), 「왕인의 『천자문』ㆍ『논어』 일본전수설 재검토」, 『역사비평』 69, 역사문제연구소, pp.191~217.
이훈종(1983),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千字文型 敎材의 探究」, 『건대학술지』 27집, pp.43~65.
임동석(2009), 「『千字文』의 源流, 內容 및 韓國에서의 發展 상황 考察」, 『중국어문학논집』 56, pp.281~304.
정후수(1998), 「천자문의 구성과 가치에 대한 연구」, 『동양고전연구』 11, pp.187~212.

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