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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의 ‘몽구(蒙求)’류의 유행과 속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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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한문의 학습서 『몽구』
중국에서는 3자구로 이루어진 『삼자경(三字經)』, 504개 성씨를 운에 맞추어 정리한 『백가성(百家姓)』, 4자구를 운에 맞추어 정리한 『천자문(千字文)』을 ‘삼백천(三百千)’이라 하여 식자(識字) 교육의 입문서로 활용하여 왔다. 또한 당나라 이한(李瀚)이 인물고사를 4자구로 정리하고 운에 맞추어 정리한 『몽구(蒙求)』도 초학자의 한문교육 교재로서 간주하였다. 이러한 교재들은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널리 활용되었고, 각각 자국의 문화적 관습에 바탕을 두어 속찬(續撰)을 하였다.

이 가운데 당나라 이한이 편찬한 『몽구』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교양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는 남북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몽구』를 읽은 문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같은 시대의 일본의 상황을 보면 한국에서도 역시 『몽구』를 수용하여 한자한문의 교양도서로 활용하였을 듯하다. 곧, 일본에서는 나라시대에 관학(官學)인 대학료(大學寮)만이 아니라 귀족의 사학(私學)도 크게 발달하였는데, 812년에 후지와라노 후유쓰구(藤原冬嗣)가 건립한 권학원(勸學院)은 대학료를 능가할 정도였으며, “권학원의 참새는 몽구를 재잘거린다(勸學院の雀は蒙求を喋る)”라는 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러한 속담이 성립하였다는 사실 자체로 당시 이미 『몽구』가 교육의 텍스트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같은 시기의 신라와 발해에서도 지식층 사이에 『몽구』가 널리 읽혔으리란 것도 추측해 볼 수 있다.
『몽구』의 성립과 유행, 그리고 속찬
『몽구』는 당나라 이한이 엮은 인물고사집이다. 중국에서는 『몽구』 이전에도 동몽 교양서들이 여럿 편찬되었다. 특히 인물 사전의 형태를 띤 유서(類書)는 교양서로서 활용되었다. 일례로 『일본국현재서목록(日本國見在書目錄)』에 의하면 육조말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옥집(琱玉集)』 15권이 일본에 전래되어, 현재 그 2권이 일본에만 전하고 있다. 『조옥집』은 현재 유실되어 권12ㆍ14 두 권이 일본에만 전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편찬된 인물고사집 가운데 중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의 교양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단연코 『몽구』라고 말할 수 있다. 『몽구』 이전에도 동몽 교양서들이 존재하였지만,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 널리 유포되어 교양 서적으로서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몽구』만 한 것이 없었다. 『몽구』는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는 요령을 확립한 교양서였다.

『몽구』는 전체 596구 2,384자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전체가 8구 1환운의 74조로 되어 있으므로, 전체 592구라고 보는 것이 옳다. 마지막 4구는 수속시(收束詩)이다. 『몽구』는 4언 8구 1조마다 압운을 하면서 압운에 따라 4언 8구 74조 592구 전체를 교묘하게 구조화하였다. 곧, 아래의 표에서 보듯, 『몽구』는 8구마다 환운할 때, 평성 다음에 반드시 측성을 두고 다시 평성을 배치하는 한편, 전체적으로는 평-상-거-입의 4성을 구분해서 대단히 체계적으로 압운을 하였다. 또한 전체는 압운의 구조로 볼 때 두 부분으로 나뉘며, 발문의 4구는 평성으로 돌아와 압운하였다. 그 구조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 1연(1구)부터 168연(336구)까지: 평-상-평-거-평-입의 순으로 환운하였다.
⒝ 169연(337구)부터 마지막 296연(592구)까지: 평-상-거-입의 순서로 환운하였다.
⒞ 수속시(收束詩)는 평성 선운(先韻)으로 마감하였다.
이한의 『몽구』는 하나의 압운 범위 안에서 거성 유운(宥韻)과 상성 유운(有韻)을 통압한 예가 한 번(189구-192구) 있기는 하다. 하지만 상성과 거성의 통압을 극력 피하였다. 압운 구조를 보면 『몽구』는 평성에서 평성으로 회귀하는 순환구조를 반복하면서 전체적으로도 평성에서 평성으로 회귀하였다. 마지막의 수장(收場)도 평성의 운자를 사용하였다.
나라(奈良)시대의 정치가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宇合, 694~737)은 「비불우(悲不遇)」라는 제목의 시에서 주매신(朱買臣)의 고사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인물사례를 담은 유서로부터 인용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후지와라노 우마카이는 명군으로 칭해졌던 태공망(太公望, 逸老)ㆍ부열(傅說, 伊人)을 언급하면서, 종의(鐘儀)ㆍ소무(蘇武)처럼 고절하기를 여러 번 했지만, 동방삭(東方朔)ㆍ주매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40살이 넘도록 보답 받지 못한 일생을 한탄하였다. 그는 44세로 몰하였으므로 ‘나이는 주매신을 넘다’라는 표현은 『한서』의 고사와 맞지 않는다. 돈황에서 발견된 유서인 『어대(語對)』의 ‘기부(棄夫)’ 항에 “매신처(買臣妻)”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는 40, 39라고 하였던 고주본(古注本) 『몽구』와 똑같은 연령을 운위하고 있다. 당시 『몽구』 이전에 존재한 유서를 통해 얻은 교양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서는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이 “이미 주매신이 부인을 깨우쳤다고 하는 나이이지 않습니까?”라고 하고, 일조천황(一條天皇)은 “확실히 후지와라노 노부카타(藤原宣方)과 같은 39세의 나이에 주매신이 부인을 깨우쳤었지!”라고 하였다. 고노시 다카미쓰(神野志隆光)는 이것을 두고, ‘『몽구』를 통해 얻은 교양’이라고 보았다.
<그림 1> 와세다대학 도서관 소장 『本朝蒙求』 卷之上
『몽구』는 고주본 이외에도 송나라 서자광(徐子光)에 의해 보완된 주석본이 널리 이용되었다. 일본에는 『몽구』의 서자광 주석본 이전의 고주본[書陵部本ㆍ眞福寺本] 및 표제본(標題本)[長承本ㆍ正倉院本ㆍ傳教家本ㆍ觀智院建保本ㆍ觀智院承永本ㆍ西來寺本ㆍ龍谷大學本ㆍ古活字合刻本蒙求標題], 그리고 고주본 계통에 이어지는 준고주본(準古注本)이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고 한다. 에도시대 오카 하쿠(岡白駒, 1692~1767)의 『전주몽구교본(箋註蒙求校本)』은 1767년에 초간된 이후, 에도말기에서 메이지초기에 이르기까지 사민(士民)의 교과서로서 널리 활용되었다.

한편, 『몽구』는 중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거듭 속찬되었다. 중국의 예를 보면, 송나라 때 왕령(王令, 字 逢源)의 『십칠사몽구(十七史蒙求)』, 범진(范鎭, 字 景仁)의 『본조몽구(本朝蒙求)』, 유각(劉珏)의 『양한몽구(兩漢蒙求)』, 서백익(徐伯益)의 『훈녀몽구(訓女蒙求)』, 조현(趙玄)[孫應符의 작이라고도 함]의 『조씨가숙몽구(趙氏家塾蒙求)』가 나왔고, 원나라 때는 호병문(胡炳文)의 『순정몽구(純正蒙求)』 등이 출현하였다. 또한 시인들은 『몽구』의 운어(韻語)를 차운(次韻)하면서 재능을 자랑하였다. 차운의 예로는 고북(姑汾) 사람 왕탁(王涿)의 『차운몽구(次韻蒙求)』와 오정수(呉庭秀)의 『신찬몽구(新撰蒙求)』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몽구’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속찬서도 있었다. 진악(陳卾)의 『사고운대(四庫韻對)』 40책은 그 일례이다. 『송사(宋史)』 「맹촉세가(孟蜀世家)」를 보면, 맹창(孟昶)의 아들 맹현각(孟玄珏)이 취학할 때 기거사인(起居舍人) 진악(陳卾)을 교수로 삼았는데, 진악은 이한의 『몽구』와 고측(高測)의 『운대(韻對)』를 모방해서 『사고운대(四庫韻對)』 40책을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미암 유희춘의 『속몽구분주』
조선에서도 주해서와 속찬서가 간행되었다. 주해서로서는 조선후기의 홍익주(洪翼周)가 『몽구주해(蒙求註解)』를 엮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속찬서는 그보다 훨씬 앞서서 16세기 말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속몽구분주(續蒙求分註)』를 엮어서 간행한 것이 유명하다. 조선후기의 이규경(李圭景)은 『십삼경몽구(十三經蒙求)』를 엮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 가운데 유희춘의 『속몽구분주』는 1568년에 초간된 이후 여러 판본이 현존하며, 흔히 『속몽구』라고 간칭한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목판본의 서지사항을 들면 다음과 같다.
『續蒙求』 4권 4책, 四周單邊, 半郭: 25.2×17.3cm, 有界, 10行 20字, 上下黑口, 內向黑魚尾 ; 31.3×20.9cm. 跋: 隆慶二年(1568)〔……〕李大伸謹跋, 序: 嘉靖戊午(1558)〔……〕善山柳希春書于鐘山土廬, 題後: 萬曆乙亥(1575)〔……〕柳希春書于漢都寓舍.
이 『속몽구』의 조선 판본은 일본에 건너가 1659년(일본 연호 萬治 2)에 복간되었고, 향보(享保) 연간에 관아에서 만든 관판본도 나왔다. 일본의 만치(萬治) 판본은 『속몽구』의 신포우사제후본(薪浦寓舍題後本)을 복각하고, 훈점과 오쿠리가나 등을 붙였다. 또 일본 국내에서도 독자적인 속찬서가 다수 나왔는데, 그 최초의 것은 1686년(일본 연호 貞享 3)에 스가 도루(菅亨)가 이룬 『본조몽구(本朝蒙求)』라고 한다. 그 편찬은 만치본(萬治本) 『속몽구』의 뒤에 이루어졌으므로 『속몽구』로부터 일정한 자극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2> 東洋文庫 소장 『續蒙求分註』
조선의 유희춘은 유배지에서 『속몽구』를 엮어 본문을 거의 완성하고 분주(分註)를 작성한 후, 유배에서 돌아와 오랜 기간에 걸처 개정하였다(『미암일기초』 제2책 戊辰下(1568) 7월4일). 유희춘은 「속몽구제(續蒙求題)」에서, 이한의 『몽구』, 범진의 『송조몽구』를 보완하고, 명나라 때까지의 인물고사를 선별하여 4책으로 정리하고, 스스로 분주를 가하여 『속몽구』를 편찬한다고 하였다. 이한의 『몽구』는 상고에서부터 남북조시대까지로 그치고 범진의 『몽구』는 송나라 초에 한정되어 있어, 수나라부터 명나라까지의 인물고사를 망라한 것이 없는 데다가, 범진의 『몽구』는 전체 책이 동방에 전래하지 않아서 읽을 수가 없어 안타깝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유희춘은 공자가 ‘찬역(贊易)’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인물의 언행을 기록해서 적덕(積德)의 방편으로 삼고자 해서 『속몽구』를 엮었다고 밝혔다.
유희춘의 『속몽구』는 『몽구』처럼 옛사람의 사적을 채집하여 유별로 짝을 이루도록 하고, 마치 관주(貫珠)와 연벽(聯璧)처럼 글자를 정돈하고 운을 맞추어, 인물의 일화를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성송(成誦)에 편하게 하였다. 곧, 『속몽구』는 『몽구』와 마찬가지로 4언 4구 1조의 전체 592구 74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속몽구』는 『몽구』와 달리 인물의 일화가 수록된 소재를 명확하게 밝히는 한편, 인물의 출처행장에 관한 언론을 덧붙였다. 유희춘의 『속몽구』는 모두 107종의 서적으로부터 592인의 인물일화와 제가논평을 추출하여 정리하였는데, 인물의 일화는 『송원통감(宋元通鑑)』, 『자치통감(資治通鑑)』,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 『주자어류(朱子語類)』, 『통감강목(通鑑綱目)』, 『주자전서(朱子全書)』 등을 다용하였고, 명나라 하흠(賀欽)의 『의려집(毉閭集)』을 참고로 하였다. 유희춘은 특히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중시하였다.

『속몽구』는 전체 구조를 4언 8구 1환운 74조, 총 592구 2,380자로서 표제어를 구성하였다. 즉, 표제의 성어는 8구마다 압운하고, 압운자로 사용한 296자는 전혀 중복하지 않았다. 통압의 예도 매우 적어서, 불과 2회에 그쳤다. 곧, 입성 옥운(屋韻)과 각운(覺韻)을 통압한 예와 거성 제운(薺韻)과 상성 제운(霽韻)을 통압한 예가 각각 한 번씩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압운 방식은 이한의 『몽구』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속몽구』의 압운 구조는 이한의 『몽구』와는 달리, 순환구조를 형성하지 않고 있다. 곧, 이한의 『몽구』가 평상거입의 4성을 매우 규칙적으로 교대로 배치한 것과 달리, 유희춘의 『속몽구』는 그러한 규칙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아래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8구마다의 환운 형식은 다음과 같다.
상-입-입-평-평-평-평-평-거상성통압-평-평-상-평-거-상-입-입-평-거-거-상-평-상-입-평-평-평-평-거-상-거-거-입-상-평-입-평-평-평-상-상-평-평-상-입-평-입-평-입-거-거-입-상-입-평-입-상-평-거-입-평-평-거-입-상-평-평-평-상-평-입-거-거-평-상거성통압
유희춘의 『속몽구』는 인접하는 운자가 같은 평성이나 같은 측성이라 해도 결코 8구의 운목을 다음 8구의 운목과 동일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 곧 평성운과 평성운이 연속되더라도 그 두 평성운은 서로 운목이 다르게 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평상거입의 4성을 규칙적으로 교대로 배치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유희춘의 『속몽구』가 주제 중심으로 인물고사를 배치한 결과, 형식적 순환구조를 우선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호병문의 『속몽구』
유희춘은 『속몽구』를 편찬하면서, 원나라 호병문(胡炳文)의 『순정몽구(純正蒙求)』를 참조한 면이 있다. 이를테면 권3 제31조 “王達哭死, 應辰護謫”에서 유희춘은 송나라 복부(僕夫)였던 왕달(王達)이 둔전낭중(屯田郞中) 이담(李曇)을 구한 이야기를 『자경편(自警編)』(권6 「사군류(事君類)․충의(忠義)」의 내용을 축약)에서 취하였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호병문의 『순정몽구』 하권 “王達救主, 延嗣恤孤” 조에도 실려 있어서, 유희춘이 선별 때 『순정몽구』를 참고로 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유희춘의 『속몽구』는 호병문의 『순정몽구』와 마찬가지로, 유교적 교훈담을 집적하고자 해서, 모두 이한의 『몽구』와는 취향을 달리 하였다.

호병문은 『순정몽구』에서 유교적 이념에 따라 일정한 기준을 세워 360구의 일화들을 정렬하여 2구 1연의 표제어를 설정하였다. 『순정몽구』는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에서는 가르침을 거론해서 인륜을 명확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중권에서는 몸을 세워 세상에 대처하는 도를 설명하였으며, 하권에서는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접하는 마음가짐을 기록하였다. 호병문은 『순정몽구』의 각 권 앞에 이러한 차서(次序)의 이념을 밝혀두었다. 하지만 유희춘의 『속몽구』는 호병문의 『순정몽구』와 달리 초학자의 입문수양의 길을 차례대로 논하지 않고 우주의 생성 원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윤리관계를 중시하는 순서로 논하였다. 또한 호병문의 『순정몽구』가 아동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체를 360구 3권으로 축소시킨 것과 달리, 유희춘의 『속몽구』는 이한의 『몽구』를 그대로 모방해서 4언 8구 1환운 74조 총 592구를 작성하였다.

호병문의 『순정몽구』는 평성 압운의 다음에 측성 압운, 그리고 다시 평성 압운으로 순환하는 체계를 지켰다. 하지만 상성과 거성을 통압한 곳이 상당수 있다. 제17연~제180연은 기본적으로 평성의 운을 모았지만, 주제의 맥락상 부득이 상성 침운(寝韻)의 글자를 한 구에 사용하고 말았다. 각 8구 4연의 압운 방식을 보면, 약간의 오류가 있다. 이를테면 제89연 “李勣贈刀, 范丹佩帶”에서 ‘帶’는 거성 태운(泰韻)에 속하는데, 본래 평성 미운(微韻)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우연한 잘못인지, 주제에 견인된 불가피한 글자 선택인지 알 수가 없다. 제152연 “司馬錄善, 歐陽美詞”의 ‘詞’는 평성 지운(支韻)에 속하는데, 본래 이곳에는 상성 지운(紙韻)․어운(語韻)․제운(薺韻)과 통압되는 상성의 운자를 놓아야 할 곳이다. 그 아래 연속으로 평성 지운(支韻)의 8구 4연이 연속되므로, 잘못 이끌린 듯하다.
현실음에서 영향을 받은 듯, 제81연~제84연에서 평성 침운(侵韻)을 평성 진운(眞韻)과 통압한 예, 제113연~제116연에서 평성 염운(鹽韻)을 평성 선운(先韻)과 통압한 예와 같이 평성의 [-m]과 [-n]을 통압한 예도 있고, 제45연~제48연에서 입성 월운月운과 입성 緝운, 그리고 거성 宥를 통압한 것과 같이 입성과 입성, 입성과 거성의 통압에서 현실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곳도 있다. 이에 비해 유희춘은 주제를 중심으로 『몽구』의 표제성어를 선정하고 전체 구조를 편성하되, 이한의 『몽구』에 충실하게 8구 환운 74조 592구의 구조를 지켰다. 하지만 주제 중심의 방향과 압운 중심의 방향이 충돌하여, 평성과 측성의 교질(交迭) 구조를 지킬 수가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속몽구』는 1659년에 일본에서 복간되고 향보(享保) 연간에는 관판본도 나왔다. 17세기 이후 일본 지식인층은 대체로 압운의 구조를 문자활동에서 능숙하게 활용하지는 못하였으나 일부 지식인은 압운을 치밀하게 연찬하였다. 게다가 자국의 역사와 생활을 매우 중시하여, 스가 도루(菅亨)의 『본조몽구』(1686)을 비롯한 독자적인 『몽구』의 속찬서가 출현하게 하였다. 『본조몽구』는 압운의 구조도 매우 중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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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