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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위사행(問慰使行)과 『해행기(海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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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와 문위행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로는 크게 보아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하는 ‘통신사(通信使)’와 예조참의의 명의로 대마도주에게 파견하는 ‘문위행(問慰行)’이 있었다. 문위행은 조선 후기의 중국 사행 중 역관이 정사로 파견된 뢰자행(賚資行)에 대비된다. 뢰자행은 중국에 상주문을 올리고 책력을 받아오고 표류민을 송환해 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문위행은 대마도주가 에도 참부(參府)를 마치고 대마도에 돌아오거나, 대마도주나 장군의 경조사 문위(問慰) 등 긴급한 외교사무를 처리할 때 예조참의의 명의로 당상역관을 대마도주에게 파견하였다. 이들 문위행의 구성과 파견 절차 및 행로는 통신사 파견에 준하여 행해졌다.

통신사행은 일본 막부장군의 습위(襲位)를 축하하기 위해 에도(江戶)까지 왕래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총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이에 비해 문위행은 대마도주 종씨(宗氏)를 문위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632년부터 1860년까지 총 54회에 걸쳐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문위행은 조선 후기 조선의 대일 외교 정책을 수행하는 데 외교 실무의 일선에서 실질적인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통신사행과 함께 매우 중요하다. 평균 4∼5년에 한 번씩 파견된 문위행은 20∼30년에 한 번 파견된 통신사행에 비해 실질적으로 두 나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다. 특히 1811년 통신사가 단절된 이후에도 계속 파견되어 양국의 외교를 지속했다는 데 그 의의가 높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문위행 구성이 당상관과 당하관 이하 총 24종의 직종에 91인의 인원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규정대로 91인을 파견한 문위행은 1704년 단 1회뿐이고, 적은 경우는 45인에서 많게는 154인에 이른다. 통신사는 문관 고급 관리가 정사(正使)로 파견된 ‘사(使)’였고, 대마도로 파견된 문위행은 역관이 정사로 임명된 ‘행(行)’이었다. 문위행의 규모는 당상관 1∼2인, 당하관 1인 외에 군관·포수·취수 등을 포함하여 적을 경우에는 40∼50명이었지만 대개 70명 선을 넘었다. 문위행의 대마도 왕복일정은 평균 92일 간이고, 대마도주가 있었던 부중(府中) 체류일은 평균 80일이었다. 그러나 짧게는 29일(1651년)부터 길게는 247일(1858년) 동안 체류하기도 했다.

‘문위행’이라는 용어는 『통문관지(通文館志)』, 『증정교린지』에서 ‘통신사행’과 더불어 조선의 대일외교사행의 한 항목으로 사용되었다. ‘도해역관(渡海譯官)’(『변례집요(邊例集要)』), ‘문위관행(問慰官行)’(『탁지지(度支志)』), ‘상관지행(象官之行)’(『종씨실록(宗氏實錄)』)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문위행 명칭과 관련하여 문위행, 문위관(問慰官), 그리고 ‘역사(譯使)’, ‘역관사’, 도해역관 등으로도 불렸다.
통신사행록과 문위사행록
조선에서는 일본에 통신사와 문위행을, 일본에서는 조선에 연례송사(年例送使)와 각종 차위(差倭)를 파견하였다. 그 결과 조선과 일본에는 사절의 왕래 및 외교교섭과 관련하여 많은 기록과 저술이 남게 되었다. 통신사행에 참여하는 관원을 통신사로 지칭한 데에 비해, 문위행에 참여하는 관원은 문위관으로 일컬었다. 통신사의 사행 체험을 기록한 것을 ‘통신사행록’이라고 한 것에 상응하여, 문위관의 사행 체험을 기록한 것을 ‘문위사행록’으로 지칭할 수 있다.

문위관은 통신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세 동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사행시에 일어난 일들을 수시로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승정원에 ‘별단(別單)’을 올렸다. 하지만 현재 문위역관이 작성하여 보고한 ‘문견별단(聞見別單)’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며, 문위행 관련 개인 문헌 또한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통신사행에 관해서 많은 연구가 축적되어 온 반면에 문위행 및 문위사행록과 관련해서는 연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문위행에 대한 연구는 주로 『증정교린지』, 『통문관지』, 『변례집요』, 『재판기록(裁判記錄)』, 『통신사등록(通信使謄錄)』, 『통범일람(通航一覽)』 등과 같은 사료를 활용하여 진행되었으며, 이들 사료 이외에 개인이 기록해 놓은 문위행 자료에 관해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문위행에 관한 연구가 통신사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문위행 관련 개인 문헌자료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한 문위사행록 『해행기(海行記)』
『해행기』는 우봉(牛峰) 김씨(金氏) 집안의 역관이었던 김홍조(金弘祖, 1698∼1748)가 1734년 문위행을 다녀온 이후에 쓴 것이다. 『해행기』는 문위행에 관한 개인 기록으로는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해행기』는 통신사 기록을 포함하여 현재 남아있는 일본 사행 관련 자료들 가운데 대마도와 관련된 인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통신사 연구에서는 각 개인에 의해 창작된 많은 통신사행록이 발굴되고 연구되어 왔지만, 문위행과 관련해서는 개인 사행록 자료를 소개하거나 연구한 바가 없었다. 『해행기』 자료의 분석을 통해 일본 외교 사절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문위행에 관한 이해를 심화시키며 한일 외교 및 문화교류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문위행의 주요 참가자들이 역관들이었으며, 이 기록을 남긴 김홍조 또한 우봉 김씨 가문이 역관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해행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외교 교섭의 실무 역할을 담당했던 역관의 일본 인식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해행기』는 1책(76장) 분량의 필사본으로, 현재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표제에는 ‘해행기’라고 되어 있으며, 표제 상단 우측에 ‘갑인(甲寅)’이라고 쓰여져 있다. 갑인년은 문위행이 파견된 1734년인데, 문위행을 다녀와서 그 해에 이 책이 만들어졌음을 알려준다. 이때의 문위행 파견목적은 7대 대마도주 평방희(平方熙, 1696∼1759, 재위 1731∼1732)가 물러나고, 8대 대마도주 평의여(平義如, 1716∼1752, 재위 1732∼1752)의 승습(承襲)을 치하하며 에도에 참근교대(參勤交代)를 마치고 돌아온 것을 문위하는 것이었다. 1734년 90일 정도의 일정으로, 1월 12일에 출발하여 4월 13일에 돌아왔으며, 대마도에 머문 기간은 1월 18일부터 3월 24일까지였다. 「해조서계(該曺書契)」는 예조참의 김용경(金龍慶)이 전 대마도주와 현 대마도주 각각에게 작성하여 보내는 공식 문서 2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서 내용 중에서 ‘성신으로써 서로 접해 있으니 더욱 두터워지기를 기약합니다(誠信相接, 庶期益篤)’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별폭」에는 대마도주에게 보내는 예물(禮物) 물목(物目)이 수록되어 있다.
<해행기 첫장 및 서문>
『해행기』에는 1734년 문위행에 관한 제반 사실을 매우 구체적이며 상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이를 통해 문위행의 전반적인 실태와 운영을 파악하는 데에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일례를 들면 『해행기』 서두에는 84명의 참가명단이 각 직책별로 분류되어 성명, 출신지 등이 적혀 있다. 문위행의 참가명단과 출신지역 등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해행기』에는 조선측 명단 이외에 대마도에서 제공하는 명단 65명에 대해서도 적어놓았다. 양국이 주고받은 문서, 문위행 일원에게 제공된 식사 및 선물 내역, 문위행 출발부터 도착 및 귀국까지의 구체적인 일정과 활동 상황 등을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다. 중하관(中下官) 19인의 급료는 책정이 되어 있지 않아서 상관(上官)의 것을 나누어 주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동안 문위행 연구에서는 『증정교린지』 등 외교 관련 사료에 전적으로 의존하였고 개인 사행록 기록은 활용하지 못하였다. 김홍조가 남긴 『해행기』 자료를 통해 일본 문위행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1734년의 문위행
1734年 문위행은 김홍조의 숙부인 김현문(金顯門)을 정사로, 박춘서(朴春瑞)를 부사로 하여 총 84명의 인원이 1월 12일부터 4월 13일까지 대마도를 다녀왔다. 1734년 문위행의 조선측 파견인원은 총 84명이었으며, 해당 인원의 직위, 파견 당시의 직책, 출신지 등이 『해행기』 「일행원액(一行元額)」 항목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상상인(上上官, 2인), 상관(上官, 25인), 중관(中官, 25인), 하관(下官, 13인), 중하관(中下官, 19인)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김홍조의 경우 반인(伴人)의 자격이었으며 상관에 해당되었다. 그리고 『해행기』 내에는 조선측 파견명단 뿐만 아니라, 대마도에서 문위행을 수행하기 위해 온 재판차왜(裁判差倭)의 명단 또한 수록되어 있다. 호행재판차왜(護行裁判差倭), 봉진(奉進), 전어관(傳語官), 금도(禁徒) 등의 순서로 직책과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날짜별로 문위사행의 경과를 서술하였는데, 귀로에 오른 4월 14일(부산에 도착) 기사 뒤에 일본의 문화와 풍속을 특별하게 항목별로 정리하였다. 일종의 견문록(見聞錄)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작가는 일본 대마도의 혼인, 장례문화, 형벌, 의복, 관직, 사람들의 습성, 문화적 특징 등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리고 간략하게 문위행의 노정과 기간을 정리해 두었다. 그에 따르면 1634년 1월 10일 부산을 출발하여 4월 14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총 93일의 일정에, 수로 이동 거리가 760리였다. 그 후에 5월 8일에 서울로 귀경하기까지의 일정을 간략하게 날짜별로 서술하였다.
『해행기』의 저자 김홍조
저자는 자신을 문위사행 정관의 조카이며, 반인상관(伴人上官)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고 하였다. 『해행기』 앞 부분에 당시 문위사행에 참여한 85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반인 항목에 김홍조라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이 인물이 김현문의 조카에 해당된다. 본문 내에서 작자는 두 숙부와 함께 참여하였음을 밝혔는데, 문위정사 김현문 이외에 다른 숙부는 반인 항목에 나오는 김서문(金瑞門)이다. 그리고 『해행기』에는 여러 과(顆)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데, 그 가운데 ‘김홍조인(金弘祖印)’, ‘임중(任重)’, ‘우봉(牛峰)’ 등이 권수제면에 찍혀 있다. 김홍조의 자가 ‘임중’이며, 본관이 ‘우봉’임을 알려준다. 이상의 논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추정할 때에 『해행기』의 저자는 우봉 김씨 가문의 김홍조로 확정할 수 있다.
<해행기 장서인>
김홍조(1698∼1748)는 자가 임중 또는 자중(子重)이며, 초명은 홍득(弘得)이다. 그는 사역원 봉사(奉事)를 역임한 김순문(金舜門)의 첫째 아들이었고, 우봉 김씨 역관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지남(金指南)의 손자였다. 1734년 문위행에 반인상관의 자격으로 참여하여 대마도를 다녀왔다. 당시 문위정사는 김현문으로, 김홍조의 숙부였다.

김홍조는 조선후기 역관 가문으로 유명한 우봉 김씨가의 인물이다. 우봉 김씨는 17세기 초 역과에 진출하여 약 250년간 93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다. 조선시대 역과 합격자 중 3%에 해당하며, 역과합격자 배출 가문 순위로는 다섯 번째이다. 한어(漢語) 부문 합격자가 80%에 달하며, 왜어(倭語)가 6명, 몽고어가 8명이다.

우봉 김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김지남(1654∼1718)은 18세에 역과에 합격하여, 1682년에 역관으로 일본 통신사의 일행으로 에도를 다녀왔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동사일록(東槎日錄)』을 저술했다. 1710년에는 중국 연행사로 참가하였으며, 1712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 문제를 정하는 일에 참가하는 등 한중, 한일 외교의 현장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백두산정계비를 설치할 때의 외교 활동을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이 전하며, 중국 사행록인 『연행록』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사역원 업무 전반을 집대성한 『통문관지』 편찬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배워 와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7남 3녀가 있었는데, 경문(慶門), 현문(顯門), 순문(舜門), 유문(裕門), 찬문(纘門) 형제가 모두 역과에 급제하여 역관으로 활동하였다. 『해행기』의 저자 김홍조는 김순문의 아들이었으며, 김현문의 조카였다.

김지남의 둘째 아들 김현문(1675∼1738)은 1702년 28세 때에 역과에 합격했다. 왜학을 전공하였던 그는 주로 부산 왜관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709년 부산 왜관의 별차(別差)를 역임하였다. 1711년에는 통신사행의 압물통사(押物通事)로 수행하였으며, 1715년에는 왜관을 수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동관(監董官)으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이후 20여 년의 행적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1731년 왜학 훈상(訓上)을 역임하였고, 1734년에 문위사행의 대표로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 통신사행의 체험을 『동사록』으로 남겼는데, 18세기 역관의 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을 여행하면서 느낀 호기심과 풍경에 대한 감상, 개인적인 감회, 일상들을 모두 수록하였고, 일본에 대하여 극히 사실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김홍조의 부친인 김순문(1681∼1713)은 19세에 역과에 합격했는데, 몽학(蒙學)을 전공하였다. 김순문 계통에서는 역과 합격자가 21명, 취재로 역관이 된 인물이 2명, 운과(雲科) 합격자가 2명이었다. 김순문의 후손 55명 중에서 25명이 잡과직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중인직으로 가장 큰 규모이다. 김순문의 6대손인 김득련(金得鍊, 1852∼1930)은 러시아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고 그때의 해외 체험을 기록한 『환료금초』를 저술하였다. 김순문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이 김홍조였다. 그 아래로 김홍헌(金弘憲, 1702∼1776)과 김홍익(金弘翼, 1704∼1756)은 모두 한학(漢學)을 전공한 역관이었다.

김홍조는 부친 김순문과 모친 양근 함씨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과 숙부, 조부 및 형제들이 모두 역관이었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1719년에 역과에 급제하였는데, 전공은 한학이었다. 그후 1734년 37세의 나이에 문위행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그는 부사맹(副司猛)의 지위에 있었다. 사역원봉사를 역임하였다는 것 이외에 그의 행적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밀양 박씨(1697∼1760)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역관으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의 조카인 김윤서(金倫瑞)는 역과에 합격하였고, 『중간노걸대』를 편찬하였다. 김홍조의 사촌인 김홍철(金弘哲)은 1715년에 『역어류해』를 간행했는데, 이들 서적의 간행은 우봉 김씨 가문의 저술 전통의 하나로 이해된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역어류해』
우봉 김씨 가문의 외교활동과 저술
김홍조가 남긴 『해행기』의 저술 배경과 관련하여 우봉김씨 가문의 풍부한 저술 활동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봉김씨 가문의 인물들은 역관의 외교 활동과 관련된 저술을 많이 남겼다. 『통문관지』를 비롯한 사역원 관련 저술과 외교 사행 경험을 서술한 통신사행록이 그것이다. 조부 김지남은 1682년 일본 사행의 경험을 담은 『동사일록』을 남겼으며, 중국 사행록도 저술했지만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 외에 백두산정계비 설치와 관련한 『북정록』을 썼으며, 사역원의 연혁과 중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 사항을 기록한 『통문관지』를 그의 첫째 아들 김경문과 공동으로 편찬하였다. 숙부 김현문은 1711년 통신사행을 기록한 『동사록』을 저술했다. 김지남과 김현문의 『동사일록』과 『동사록』은 그 이전 시기에는 볼 수 없었던 역관의 통신사행록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17세기 중엽까지 통신사행록의 저술이 주로 三使가 중심이 되었던 것과는 달라진 변화를 보여준다. 그 가운데 우봉 김씨 가문의 인물들이 통신사행록의 저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점이 주목할 만하며, 대마도 문위행의 사행 경험을 기록한 김홍조의 『해행기』는 이같은 우봉 김씨 가문의 사행록 저술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해행기』에 나타난 일본문화 인식
오른쪽을 따라 수십 리를 갔다. 다시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산세가 꺾이고 굽어지며 두 갈래로 나뉘어 용호상박하는 형상이었다. 정박한 선창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람을 막아주고 햇볕을 마주하니, 실로 하늘이 내린 땅이었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살고 있는 집들은 산세에 의지하였고 층암절벽 위에 빙 둘러 있었다. 꽃과 나무를 심고 소나무와 삼나무를 둘렀으며, 흰 칠을 한 담장과 나는 듯한 용마루가 솔숲과 대숲 사이로 서로 어른거렸으니, 교묘함을 다하였고 풍광이 맑고 고왔다. 이 땅 사람의 품성이 정교함을 따르기를 힘쓰니, 온갖 모든 일들이 대개 이와 같다. 대마도주는 山大助로 하여금 執事諸倭와 함께 뱃머리에서 문안을 하게 했다. 이를 구경하는 남녀노소들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수천백명을 헤아렸는데, 마치 나무 인형처럼 조용하게 있어 떠들썩한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세 차례 대포를 쏜 후에 군대의 위용을 성대하게 갖추고 육지에 내려 관사로 갔다. 선창 입구로부터 行步席을 설치하여 청 앞까지 이르렀으며, 문과 창을 달아놓은 것들이 매우 정결하였다.
문위사행의 목적지인 대마도의 부중(府中) 이즈하라[嚴原]에 도착하였을 때를 묘사한 대목이다. 대마도 번주가 기거하는 곳에 첫 도착을 하였을 때에 보았던 이즈하라 항구의 주변 풍광,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생활 모습, 문위사행단을 맞이하며 구경하는 일본인들의 태도 등을 서술했다. 화자가 느끼는 첫인상의 강렬함은 정교함과 정결함이었다. 산세를 따라 줄지어 있는 일본인들의 집들을 보면서 화자는 “꽃과 나무를 심고 소나무와 삼나무를 둘렀으며, 흰 칠을 한 담장과 나는 듯한 용마루가 솔숲과 대숲 사이로 서로 어른거리는” 모습에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서 “이 땅 사람의 품성이 정교함을 따르기를 힘쓰니, 온갖 모든 일들이 대개 이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위사행단의 화려한 행차를 구경하는 일본인들이 수천 여명을 헤아릴 정도로 운집하였지만 떠들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일본 사람들의 질서정연하며 엄격하고 그리고 정결한 모습이 화자의 눈에 특별하게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일본 지식인들과의 교유
『해행기』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일본 문화에 관한 저자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김홍조는 雨森芳洲 및 그의 두 아들들과 필담 및 서신 왕래를 통해 상호 교유를 맺고 있었으며, 그밖에 春日玄意에게 침술(針術) 등을 전수하기도 하는 등 대마도에 거주하던 일본 지식인들과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雨森東은 대마도의 文翰 예절을 전적으로 담당하였는데, 예전에 裁判差倭로 우리나라에 와서 滄浪 洪道長(洪世泰)과 서로 창화하였던 인물이다. 그의 집은 길 왼편에 있었기 때문에 미리 나와서 숙부가 탄 가마를 기다렸다가 문 입구에 이르자 몸을 굽히고 와서 문안을 올렸다. 숙부가 가마에서 내리고자 했지만, 공사에 다름이 있고 일의 형세가 절로 구별되어서 불가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숙부는 가마를 멈추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나는 그 곁에 있었는데, 그의 체모와 행동거지를 살펴보니 나이 거의 칠순이었는데도 용모가 시들지 않았고 두 눈동자가 빛나고 광채가 사람을 움직었다. 맑고 담아한 모습이 응대를 하고 말을 하는 사이에 드러났다.
위의 인용문은 저자가 대마도에서 우삼방주를 처음 보았을 때의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저자는 숙부 김현문과 우삼방주의 짧은 만남을 지켜보면서 우삼방주에 대한 첫인상을 기록해 놓았다. 우삼방주는 한문, 조선어,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조선 무역의 중개 역할을 하던 대마도번에서 외교 담당 문관(文官)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선과의 국교수복에 노력하였으며, 선린외교를 주창했다. 대등한 외교관계를 강조하여 성신외교(誠信外交)를 주장하였던 그는 우삼동(雨森東)이라는 조선식 이름을 사용했다.

우삼방주는 동래 왜관에 파견되었을 때에 김현문을 비롯하여 조선의 여러 지식인들과 특별한 친분을 맺고 있었다. 그는 김현문이 일본 통신사로 파견되었을 때에 통신사 영접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김현문과의 교유를 이어갔다. 이번 문위행 파견에서 사신단 일행을 기다렸지만, 사적인 만남이 엄격히 규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김현문과 우삼방주는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였다. 숙부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우삼방주를 처음 본 인상이 70여세의 노인임에도 광채가 빛나고 담아하고 맑은 풍모를 지녔다고 하였다.

김현문, 우삼방주의 다음 세대에 속하는 김홍조는 우삼방주의 두 아들 및 문인제자와 친밀한 교유를 나누었다.
雨森東의 큰 아들은 이름이 雨森顯之允이라는 사람인데, 일찍이 都都禁徒의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서로 더불어 만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에 그 나라의 법에 따르면 일을 맡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관아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병이 들어 와서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촌동생인 大廳奉行 吉田安右衛門으로 하여금 문안으로 하게 하고 존경의 뜻을 표하였다. 내가 편지를 써서 답장을 했다. “제가 그대와 함께 왜관에서 만난 것이 어제 일 같은데 어느덧 한 해가 지났습니다. 몹시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루 말로 다하겠습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날에 귀국에 도착하는대로 그대와 같이 문장을 논하면서 막혔던 회포를 풀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귀국의 법이 엄격하여 어그러져 버렸으니 울적한 마음 깊습니다.”
우삼방주의 큰 아들인 雨森顯之允과는 문위행 파견 이전부터 교류를 하고 있었으니, 雨森顯允이 都都禁徒의 자격으로 동래 왜관에 왔을 때에 친분을 맺었다. 대마도에 와서는 집사자 이외에 인물과 접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던 상황에다가 그 자신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서신을 통해 교류를 이어가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홍조와 우삼현지윤의 교류는 김현문과 우삼방주의 뒤를 이어 조선과 일본 외교의 실무 담당자간의 친밀한 교유 관계가 세대를 넘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雨森東과 그의 둘째 아들 松浦廳長이 나를 찾아와 읍을 하며 말했다. “존공께서는 천리 창파를 무사히 건너 오셨으니, 축하드립니다”라고 하였다.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말로만 매우 분명하게 말했다. 내가 일어나 답례를 하고 같이 마주 앉았다. 雨森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우삼원장입니다. 지난 계사년(1713)에 귀국의 왜관에서 숙부님과 교유를 하였는데, 지금 벌써 이십여년이 되었습니다. 항상 앙모하던 차에 뜻하지 않고 연회석상에서 숙부님을 이제 뵙게 되니 기쁜 마음을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 자식인 顯允은 예전에 초량에서 돌아와서는 그대가 보살펴준 은혜를 크게 칭송하였는데, 근래 괴질에 걸려 집안 출입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와서 사례를 하지 못하여 아침저녁을 탄식을 하였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대신 공경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그대의 얼굴을 보게 되니 이보다 큰 행운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답하였다. “제가 우리나라에 있을 때에 숙부님과 그대가 두터운 교유를 하고 있음을 듣고 한번 뵙고자 하였지만, 남북이 멀리 떨어져 있고 경계가 유한하여 마치 암내가 난 말이나 소가 서로 오고 갈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항상 탄식을 하였습니다. 지금 뜻밖에도 태수의 집에서 얼굴을 뵙고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우삼방주과 그의 둘째아들 雨森德允이 찾아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일본어를 쓰지 않고 조선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에 큰 인상을 받았음을 특기하였다. 또한 김홍조는 우삼방주의 문인이었던 鵬溟, 春日玄意 등과도 필담을 통해 교유를 하였다. 春日玄意와는 침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침술을 전수해 주기도 하였다.

문위행의 정사 김현문의 조카인 김홍조와 우삼방주의 두 아들, 문인 사이의 활발한 인적 교류를 통해 숙부인 김현문과 우삼방주 사이의 성신 외교가 그 다음 세대에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일 문화 교류 현장 묘사
김홍조는 『해행기』에서 한일 외교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화 교류의 장면을 부각시키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공연 장면을 매우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이 주목된다. 『해행기』에서 일본 연극 노오(能)의 공연 장면에 관해 여타 사행록 보다 훨씬 상세하고 정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먼저 김홍조는 조선측에서 파견된 재인과 악공 등의 이름을 명기하고, 그들이 풍악을 울리고 정재를 올리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서술하였다. 그 중의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악공 元達이라는 자는 본래 늙은 광대였는데, 해학적인 연희를 아주 잘 하였다. 북소리에 맞추어 일어나 춤을 추는데, 때로는 맹인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난장이의 모습을 하였다. 눈을 굴리고 코를 치켜들기도 하며, 목을 웅크리거나 팔을 펴는 등 기괴한 모습을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쪽이나 저쪽 구경하는 이들이 모두 포복절도를 하였다.
이처럼 조선측에서 제공한 연희 장면의 묘사도 흥미롭지만, 더욱 주목되는 부분은 대마도에서 제공한 일본측 연희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일본 전통 연극의 하나인 노오의 공연 양상을 묘사한 대목이다. 『해행기』에서는 鶴龜, 伯養, 舍利, 橋辨慶 등의 순서대로 일본 연극 노오가 공연되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게 형상화하였다. 대마도주가 특별하게 ‘能組’(일본 전통연극 能의 공연프로그램)를 마련하여 조선 사신단 앞에서 일본 전통연극의 하나인 노오를 공연하는 장면을 인상 깊게 서술했는데, 그 중의 한 대목을 들어본다.
또 한 동자가 머리에는 쇠그릇을 이고 몸에는 흰 비단옷을 입고서, 허리에 긴 칼을 차고 마루 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었다. 갑자기 표범 머리에 괴이한 눈을 한 자가 붉은 비단을 몸에 두르고 비단을 머리를 싸맨 채 고함을 크게 지르면서 뛰어나왔다. 큰 칼로 춤을 추며 동자를 곧장 찌르려고 하였다. 동자는 조금도 두려워 하거나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칼을 부딪히며 겨루어 서로 찌르고 공격하니 섬광이 번쩍번쩍거리고 차가운 기운이 휙 하고 불었다. 잠시 뒤에 싸움이 무르녹을 때에 갑자기 표범 머리에 괴이한 눈을 한 자가 칼을 버리고 물러나며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린 채 죄를 빌었다. 동자는 칼을 빗겨 찬 채 그를 꾸짖고는 갔다. 傳語官에게 물어보니, 이것은 ‘橋辨慶’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용맹함만을 믿고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동자가 검술을 배워 그의 흉악을 꺾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지금 이 연희의 도구들은 모두 새로 만든 것인데, 들어간 비용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原注 : 귀신으로 분장한 사람은 모두 가면을 썼다) 나는 연희의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그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지만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왈자지껄 웃으며 춤추고 발을 구르는 것을 보니 그 나라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傳語官이 전한 말이 매우 분명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웠다.
鶴龜, 伯養, 舍利, 橋辨慶은 일본 연극 노오(能)의 공연 종목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의 전통 연극의 하나인 노오는 어떤 전설이나 설화에 의거한 이야기를 피리(笛), 고쓰즈미(小鼓), 오오쓰즈미(大鼓), 북(太鼓) 등 네 종류의 반주악기에 맞추어 특징 있는 곡조로 이야기를 노래하고, 시테(仕手)라는 주연주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소리(謠)와 춤으로 사람들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희를 보이는 예능이다.

화자는 노오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습과 동작 등을 세심하게 묘사하고 아울러 관객들의 반응까지 서술하였다. 그 중 위에 인용된 부분은 橋辨慶 공연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 의미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지만 구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왈자지껄 웃으며 춤추고 발을 구르는 것을 보니 그 나라에서 전해오는 이갸기임을 알 수 있었다”는 화자의 발언에서 추정에서 보듯이, 橋辨慶은 『弁慶物語』, 『義經記』 등 室町時代의 物語에 기반을 둔 것으로, 요시츠네(義經)는 어린 소년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벤케이(辨慶)는 힘이 센 인물이다. 어린 동자가 표범 머리에 괴이한 눈을 한 자와 영민하게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중심으로 극은 진행된다. 극적인 장면을 목격하면서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언급을 통해서 일본 전통 연희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두 맹인이 떠난 뒤에, 다시 두 왜인이 榻床을 들고 나와 당 가운데에 두었다. 대개 비단 포대기 위에 작은 안석을 두었는데, 안석 위에는 아직 피지 않은 붉은 연꽃 한 송이 같은 것이 있었다. 푸른 옷을 입은 승려와 속인 두 사람이 나와서 그 곁에 서서 부처님께 공양을 하였다. 갑자기 머리를 풀어헤친 흰 얼굴의 귀신이 몸을 숨겼다가 몰래 나와서 탑 위로 뛰어올라 붉은 연꽃을 빼앗아 달아났다. 승려와 속인 두 사람은 비로소 알아채고는 발을 구르며 안절부절하다가 간신히 쫒아가 빼앗아서는 다시 안석 위에 올려놓고 손을 모아 염불을 하였다. 이번에는 감색 머리카락을 한 황금빛 얼굴의 귀신이 몸에는 비단에 금실로 지은 옷을 입었는데, 매우 험상궂게 생겼다. 커다란 입을 활짝 벌리며 갑작스럽게 뛰쳐나와 붉은 연꽃을 낚아채고 작은 안석을 밟아 부셔버리고는 뛰쳐오르며 춤을 추었다.
승려 속인 두 사람이 감히 가까이 다가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땅에 쓰러져버렸다. 홀연 붉은 얼굴에 금빛 눈동자를 한 神將이 머리에는 쇠그릇을 이고 몸에는 법의를 입었으며, 손에는 황금 채찍을 들었다. 단숨에 탑 옆으로 가서 그 귀신을 쓰러뜨리고서 황금 채찍을 들어올려 배와 등을 휘어쳤다. 그 귀신은 경황없이 붉은 연꽃을 꼭 끌어안고 탑 아래에 웅크린 채 엎드렸다. 붉은 얼굴에 금빛 눈동자를 한 神將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치고 그 귀신을 번쩍 들었다가 엎어뜨리고서 다시 붉은 연꽃을 빼앗았다. 그 귀신은 틈을 타서 몸을 빼서 도망가는데, 승려 속인 두 사람과 함께 천천히 들어갔다. 전어관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했다. “공연의 제목은 ‘사리’입니다. 아직 피지 않은 붉은 연꽃 같은 것이 바로 사리입니다. 사람들이 승려에게 청하여 부처에게 공양을 하는데, 마귀가 사리를 빼앗았다. 그래서 부처가 神將을 보내어 다시 사리를 빼앗으니, 근본으로 돌아가는 뜻을 말합니다.”
포복절도를 하며 노오 공연을 관람하는 관중들의 모습, 그리고 노오 공연의 세세한 장면 묘사 등이 매우 돋보인다. 극중 인물의 동작과 사건의 전개 등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마치 독자로 하여금 공연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끔 하였다. 대체로 조선의 사신단들이 일본 연희 장면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보이거나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에 그친 것과는 다른 입장과 서술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우호적이며 적극적인 감상 태도가 일본 전통 연극인 노오의 공연 상황과 등장 인물에 관한 매우 정밀한 묘사로 이어진 것이다.
대마도의 풍속과 생활 묘사
『해행기』 내에 보이는 일본 문화에 관한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서술 시각은 대마도의 풍속과 생활을 집중적으로 서술해 놓은 대목에서도 일정 정도 확인된다. 金弘祖는 일자별 기록과는 별개로 『해행기』의 끝부분에 대마도의 풍속과 생활, 제도 등을 항목별로 집중적으로 서술해 두었다. 통신사행록에 보이는 견문록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다루는 범위는 혼례, 장례, 형벌, 의복, 관직, 성품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일본의 풍속에 대해 대강 들었다. 혼인할 때의 禮物에는 文武의 구분이 있었다. 武官은 갑옷과 투구, 보검, 총과 창, 활과 화살 등을 사용했고, 文官은 채색 비단과 문방구류를 사용했다. 아침에 예물을 보내고 저녁에 혼례를 올렸는데, 친척 및 이웃사람들과 함께 친가에 이른다. 신랑과 신부는 그 날에서 항시 행하는 酒禮와 같이 九酌禮를 행했으며, 기러기를 가지고 가서 상 위에 놓고 절하는 예절은 없다. 九酌禮가 끝나면 주인과 손님들이 한 곳에 모여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 신부와 함께 집으로 곧장 돌아와 부부가 된다. 남자는 20여세, 여자는 15,16세 이후에 비로소 혼인을 올린다.
백성을 통치하는 방법은 간편함을 힘써 따르며 백성들을 침탈하지 않았다. 혹 필요한 일이 있으면 값을 주고 고용하였으며, 일수를 계산하는 노역의 경우에는 身役으로 내는 은을 감면해 주었다. 고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을 즐기면서, 원망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마도민에 대한 침탈이 심하지 않아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기를 즐겨 하면서 생활하는 모습에 화자는 주목을 하였다. 물론 『해행기』에는 대마도민들의 생활 풍습에 대해 비난하는 부분도 존재한다. 예컨대 “물건을 사고 파는 데에 있어서는 죽음을 내던지고 다투며, 터럭 하나 세세한 것까지 이득을 따진다”고 하여 장사 이익만을 추구하는 풍조를 비난하였다. 또는 먹고 입는 것을 호화스럽게 하면서 죽은 사람의 장례는 소홀하게 처리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풍습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들 수 있다.
일본문화에 대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태도
부분적으로 일본 문화와 생활 풍습에 관해 우월감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비판하고 있지만, 저자는 『해행기』 내에서 일본 및 일본 문화에 관해 비교적 객관적이며 사실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일본 지식인과의 교류 및 일본 전통 연극인 노오의 공연 상황에 관한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감상 태도는 주목되는 점이다. 그리고 김홍조의 『해행기』에 보이는 이러한 점은 김지남과 김현문의 일본 사행록의 서술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현문이 일본 통신사 사행의 경험을 서술해 놓은 『동사록』은 18세기 역관의 일본 인식을 잘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 바, 일본을 여행하면서 느낀 호기심과 풍경에 대한 감상, 개인적인 감회, 일상들을 모두 수록하였고, 일본에 대하여 극히 사실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김홍조 또한 숙부인 김현문의 일본 사행록 서술의 시각을 이어받고 있으며, 특히 일본 전통 연극인 노오와 조선인이 제공한 연희 장면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여 이를 집중적이며 상세하게 형상화하였다. 김홍조의 『해행기』 저술 및 『해행기』 내에 보이는 일본 문화, 특히 전통 공연 장면 등에 관한 적극적이며 우호적인 서술 태도는 17세기 중후반에서 18세기로 이어지면서 김지남 이후로 중인 출신 가문으로 크게 성장하였던 우봉김씨 집안이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 실무 업무를 담당하는 동시에 풍부한 저술 활동을 통해 문화적 역량을 강화해 갔던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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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