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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한어(韓語) 교육과 나카무라쇼지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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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문고의 나카무라쇼지로 기증본
일본 동경대의 오구라문고(小倉文庫)에는 다수의 한어(韓語)학습서가 있다. ‘한어’란 조선 후기 대마도에서 ‘조선어’를 일컫던 말이다. 이 한어학습서들은 대부분은 대마도의 통사를 지낸 나카무라쇼지로[中村庄次郞 1855-1932]가 오구라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에게 기증한 책들이다. 나카무라쇼지로는 대마도 이즈하라(嚴原) 출신의 조선어 통사로서, 14살 때 처음으로 부산에 다녀갔으며, 이어서 1873년 일본이 부산에 초량관 어학소를 설치하자 거기서 한국어를 공식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 후 계속 한국에 머무르면서 한·일간의 외교협상에 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10년에 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도 계속 부산에 살면서 1932년 여름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를 만나 한국어 학습서 및 학습자료 ‘합계 30여 책’을 기증하였고, 19세기 말의 한국어 학습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1932년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를 만난 다음 달에 부산에서 운명을 달리하였다고 한다. 『엄원교육사(嚴原敎育史)』(1973:73)에 의하면, 대마도의 통사로서 메이지[明治] 5년(1873) 6월 한어학소를 처음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의 광청사(光淸寺)에 설치했을 때 교사로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그가 지니고 있었던 교재들은 대마도에서 시작된 아메노모리호슈의 한어 교육의 전통으로부터 내려져 오는 교재의 전형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동경대학 오구라문고 소장 『한어(韓語)』
대마도의 한어 교육과 교재
임진왜란 후 조선과 일본이 통교를 다시 시작한 이래,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유일한 공식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대에 있어서 일본에서의 조선어 학습은 대마도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17세기 초 당시 일본은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시켰으나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전담하는 기구를 두지 않고, 그 일을 대마도의 도주인 소오[宗]씨에게 일임하였다. 그 이유는 대마도가 지리적으로도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소오씨가 오랫동안 양국의 교린 관계를 전담하던 중개자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에서는 한국과의 교류가 대마도 이외의 장소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마도 이외의 장소에서 조선어를 배우려면 이곳으로부터 교재를 얻어다가 베껴서 공부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일본에서의 본격적인 한어(韓語) 교육은 18세기 초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의 통사양성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지리적 관계 등의 이유로 대마번은 조선어를 이해하는 사람도 많고 학습자의 층도 두터웠던 것 같다. 통신사의 방일시 보통 50명 내외의 사람을 통역으로 동원하였다 하며, 대마도에서의 통사 양성은 세습적인 ‘육십인(六十人)’ 상인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상인가에서 태어나 부모와 친척들로부터 조선어의 기초를 배우고, 이후 부모와 동행해 왜관에서 현지교육을 받았다. 통역관 육성을 상인의 가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 한어(韓語) 학습의 선구적인 존재는 아메노모리호슈[雨森芳洲, 1668~1755]이다. 그는 에도[江戶] 시대의 유학자이자 대마도에 파견된 외교관으로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22살 때 대마번의 번유(藩儒)로 초청을 받아 35세 때부터 조선외교에 종사하면서, 다음해부터 2년간 걸쳐 조선 유학을 감행했다. 그는 늦은 나이(36세)에 외국어를 배우면서 ‘목숨을 5년 줄인다는 각오’로 공부했다고 한다. 아메노모리호슈는 대마번의 유학자로 종사하는 동안 초량왜관에서의 조선어 학습 교재 편찬, 대조선 외교·교류의 체험을 쌓아 1720년에는 통역양성 계획서인 「한학생원임용장(韓學生員任用帳)」을 제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727년에 대마도 이즈하라에 공립통사양성소라 할 수 있는 한어사(韓語司)를 개설하게 된 것이다.

이 한어사는 주로 대마도에서 통역을 담당하던 통사(通事)를 양성하였으며, 이곳을 통한 대마번에서의 조선어 통사 양성은 그 후 메이지(明治) 시대 초까지 계승되었다. 메이지 정부가 대조선 외교를 직접 장악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대마번이 주관해 온 조선어 통사 양성은 일본 외무성(外務省) 관할 하로 들어가게 된다. 일본 외무성이 대마번 이즈하라의 동본원사파(東本願寺派)·광청사(光淸寺)에 한어학소(韓語學所)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메이지 정부가 설치한 최초의 한국어 교육기관이었다. 이 이즈하라의 한어학소는 1873년 10월에 부산에 있던 초량공관 내의 첨관옥(僉官屋, 大谷派·東本願寺)으로 이전하여 외무성 초량관어학소(草梁館語學所)로 개칭되었다.

대마도의 한어사에서는 한어 학습의 목적에 따라 다른 교재를 사용하였는데, 아메노모리 호슈가 제시한 목적별 학습 교재는 다음과 같다.

한어 학습의 목적

사용된 교재

조선한자음 연습

유합(類合), 십팔사략(十八史略)

한어교육의 단계별 교재

교린수지(交隣須知) 물명책(物名冊), 한어촬요(韓語撮要), 숙향전(淑香傳) 등의 소설

한학(漢學)

소학(小學), 사서(四書), 고문(古文), 삼체시(三體詩)

1> 한어 학습의 목적에 따른 교재

아메노모리호슈가 <조선사계고어면장(朝鮮詞稽古御免帳)>(국사편찬위원회소장)에서 제시한 한어 학습의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梅田博之:2003).

(1) 『類合』, 『十八史略』의 조선어음을 매일 조선어 역관에게 가서 모어 화자에게 배운다.
(2) 『小學』, 『四書』, 『古文』, 『三體詩』를 東向寺의 일본인 승려 밑에서 순서에 따라 배운다.
(3) 『物名冊』, 『韓語撮要』, 『淑香傳』 이 세 단계로 이루어지는 강독을 한다. 이는 미리 일본인 교원이 조선어 화자 밑에서 淸濁高低(평음, 경음, 격음)를 확실히 익혀서 지도한다.
(4) 매월 3일, 8일에 네 사람 중 한 사람이 출제자가 되어 주제를 제시하고, 나머지 세 사람이 조선어로 토론한다.
(5) 토론이 끝나면 그것을 한글로 적어 아메노모리호슈에게 보낸다. 각각 그 내용들을 책으로 철할 수 있도록 서류를 보낸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제안한 한어 학습은 조선시대 사역원의 학습 방법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선 『유합』과 『십팔사략』을 읽어 조선어음을 익히고, 『물명책』 - 『한어촬요』 - 『숙향전』의 세 단계에 걸친 수준별 어휘 학습, 강독을 하는 것이었다. 즉, 그가 제시한 학습법은 <12, 13세로부터 14, 15세까지>라는 언어형성기를 고려한 학습자의 연령제한의 규정에 따르는 것이었는데 습자(習字), 음운(音韻), 어휘(語彙), 강독(講讀)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의 사역원에서 각종 외국어를 교육할 때와 유사한 방법으로, 왜학의 경우 『이로파(伊路波)』를 통하여 일본 가나 문자를 익히고, 각종 훈몽교과서를 통하여 단어, 구등을 익힌 후, 『첩해신어(捷解新語)』와 같이 수작할 때의 회화를 익히고, 『인어대방(隣語大方)』과 같은 고급 문장을 익히는 식의 단계를 취한 것과 같다. 여기에 더 보태자면 『왜어유해(倭語類解)』와 같은 어휘집을 참고하는 것은 전술한 『물명책(物名冊)』을 익히는 단계일 것이며, 후대에는 나아가 『숙향전(淑香傳)』과 같은 소설까지 읽히게 하는 것이다.
나카무라쇼지로 기증본 목록
오구라신페이는 나카무라쇼지로에게서 받은 기증본들을 별도로 목록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그 목록이 발견되었다. 이 목록에는 총 28종 31책의 간단한 서지사항과 책의 특징을 기록해 놓았다. 그가 기증한 책들 가운데는 어학서도 있지만 조선의 문화와 역사, 대외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책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목록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서명

책수 및 표기

오구라신페이(小倉進平)의 기록

1

재간 교린수지(再刊 交隣須知)

4

외무성장판(外務省藏版) 메이지16(1883) 3월 인행(印行)

2

정정 인어대방(訂正 隣語大方)

93

외무성장판 메이지14(1881) 6월 인행

3

임경업전(林慶業傳)

()

외무성장판 메이지14(1881) 10월 인행

4

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

1

5

별춘향전(別春香傳)

건곤(乾坤)2

사본(언문)

권말 ‘紀元二千五百三十五年 明治八歲(1875)乙亥五月初旬寫之 中村庄次郞 十九歲十月

권말 ‘紀元二千五百卅六年 明治九歲(1876) 十一月初旬寫之

乾坤 모두 초량진(艸梁鎭)에서 베낌. 中村庄次郞이라고 써 있음.

6

최충전(崔忠傳)

1

권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于昨明治六年(1873)癸酉第六月外務省於語學所寫 主中村庄次郞

~ 외무성의 韓語學校 이즈하라(嚴原)에 설치. 메이지(明治)5(1872) 11校長 森山茂 敎授 荒川德玆 助敎 住永友輔 三秀才士 말을 듣다.

7

계몽편언해(啓蒙篇諺解)

1

필자연대 불명

8

왜어유해(倭語類解)

1책 사본

9

인어대방(隣語大方)

1책 사본

4매 반. 인어대방(隣語大方)의 초안

10

고래교린사고(古來交隣事考)

1책 사본

한문

권말 ‘紀元二千五百三十四年明治七年(1874) 甲戌十一月於草梁公館寫 中村庄’라고 써 있다

11

유년공부(酉年工夫)

1책 사본

언문

권두 표지에 ‘紀元二千五百卅六年 明治九年(1876)九月韓國釜山於草梁項寫’라고 써 있다. 수십편의 이야기를 수집한 것. 방언연구의 자료.

12

금고기관(今古奇觀)

1책 사본

한자언문

섞여 있음

권말에 ‘紀元二千五百卅六年明治九歲(1876) 丙子十一月中旬於草梁公館謄寫 中村庄次郞’라고 써 있다. 이야기 兩縣令成婚事, 八銀人, 洞庭紅 포함한다.

13

상담(常談)

조선어회화서, 일본어는 고풍(古風)

14

강화(講話)

21책 사본

한자언문혼용

권두서명의 오른쪽 아래에 ‘中村芳之助’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또 권말에 ‘中村芳之助’라는 서명이 있다. 그 오른쪽에 ‘庄生之義父而??識越類’라고 적혀있다. 庄次郞翁 義父인가.

신사(信使) 응접의 인사와 기록, 捷解新語』의 내용과 유사하다.

15

한어(韓語)

1책 사본

소형

권말에 ‘明治十四年(1881)六月寫 中村庄次郞라고 적혀 있다.

한불자전』에서 발췌한 조사, 조동사 등의 사용 일람.

16

거창별곡(居昌別曲)

1책 사본

가곡

17

복문록(復文錄)

1책 사본

표지 ‘明治乃八年(1875)秋八月迭’라고 써 있다.

갑술년(1874)의 일지(日誌), 조선문을 짓는 연습과 그것을 누군가 주필(朱筆)로 첨삭하다.

18

언문(諺文)

1책 사본

표지에 ‘紀元二千五百卅六年明治九年(1876) 五月於鷄林寫 中村松景가 있다. 본서에 小田管作상서기문습유(象胥紀聞拾遺)(天保十二年西紀1841)를 베낀 것이 붙어 있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뒤에‘八月念九與朝鮮信使一行會飛鳥山澁澤氏別業席上筆話(한문)을 실었다. 川田瓮江 강기(姜王夔)가 교환한 조선어 언문에 관련 담화가 있다.

19

복문록(復文錄)

(仮名)

1책 사본

표지의 뒤 본문 처음에‘明治六年(1873)嚴原於語學所譯文가 있다. 1112일부터의 일지 형식의 것.

앞에 『복문록』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매일 조선문을 연습하고 누군가가 朱筆 첨삭하였다. 六月十五日試驗 浦賴’라고 쓴 것도 있다.

20

대의론(代疑論)

1책 사본

체계를 갖춘 서술이다. 잘 갖춰진 문어론(文語論)이다.

21

조선복제법(朝鮮服制法)

1책 사본

권말에 ‘文政九(1826)丙戌四月日寫 平氏라고 되어 있다.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22

건국연혁(建國沿革)

1책 사본

23

조선관품과

이성으로부터의 역사기

(朝鮮官品並李姓ヨリノ歷史記)

1책 사본

표지에 ‘紀元五百三十六年明治八年(1875)五月於草梁項寫라고 되어 있다

24

조선책략(朝鮮策略)

1책 사본

주왜공사 참찬관 황준헌(住倭公使參贊官黃遵憲)이 편찬.

권말에 ‘明治十五年(1882)春三月中村庄次郞所?’라고 써 있다.

25

명월순자결(明月順字訣)

1책 사본 한문

26

북경로정기(北京路程記)

1책 사본

서문의 끝에 ‘千時弘化二乙巳年(1845)夏二世大象胥官致遠編’이라고 되어 있다. 글 가운데, 小田致廣記, 文化元甲子年(1804)七月日 大象官小田致善編’이라는 기사가 있다.

27

성교(聖敎)

1책 사본()

언문 섞임

권말에 ‘明十一年(1877)一月寫’라고 적혀 있다.

28

천주십계(天主十戒)

1책 사본()

언문 섞임

표지에 ‘明治十年(1876)第十二月謄寫’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오구라신페이가 남긴 나카무라쇼지로 기증본 목록과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