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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과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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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연구에서의 금석문 활용
광의의 금석문은 금문, 석문, 토기 명문(銘文), 목간(木簡) 기록, 포기(布記),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 기록 묵서, 명문(銘文) 등을 포괄한다. 금석문은 문헌자료와 고고학 발굴 자료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문자 기록을 의미한다. 혹은 서책 이외의 물건에 기록한 것을 명사(銘辭)라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분야를 명사학(銘辭學), 명문학(銘文學)이라고 구별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명칭은 아니다. 한편, 갑골문(甲骨文)이나 금속 화폐 명문, 인문(印文)은 금석문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곧 금석문의 자료는 비문(碑文), 묘지(墓誌), 불상 명문, 종명(鐘銘), 도검명(刀劍銘), 목간(木簡), 토기 명문, 와전명(瓦塼銘) 기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금석문은 한국학 연구의 대상이나 기초자료로 삼을 수 있다.
① 금석문의 모든 자료는 소학(문자, 음운학, 훈고학) 발달의 역사를 서술하는데 1차 자료가 된다.
② 금석문 가운데 완전한 형식을 갖춘 것은 장르 및 문체 연구의 자료가 된다.
③ 묘주(墓主), 소장자, 제작자, 찬술자가 밝혀져 있는 자료는 한문학사 및 지성사를 서술할 때 인물 연구와 사회문화 토대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금석문 연구의 현황
우리나라에서 금석문 연구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영, 정조 때부터이다. 주지하다시피 영조 때 김재로(金在魯, 1682-1759)는 고려, 조선의 탁본을 『금석록(金石錄)』에 실었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이계집(耳溪集)』에서 삼국, 고려의 여러 금석문 자료에 관한 과안기(過眼記)를 실었고,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금석문 이름과 소재지, 건립 연대 등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밖에 이익(李瀷, 1681-1763),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한치윤(韓致奫, 1765-1814), 조인영(趙寅永, 1782-1850)도 금석문을 수집하거나 연구하였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전국의 저명한 금석문을 조사하여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이루었다. 특히 김정희는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하고 그 내용을 고증하였다. 그 뒤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은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엮어, 삼국 이래 금석문의 목록과 몇몇 금석문 판독문을 실었다.

한편 청나라 사람 유희해(劉喜海)는 삼국, 고려시대 금석문의 판독과 이에 대한 고증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으로 정리했다. 또 왕창(王昶)의 『금석췌편(金石萃編)』에도 우리의 금석문이 일부 실려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금석문을 6년 동안 조사하여 탁본 1천여 점을 제작, 조사하고, 1919년에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을 간행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가츠라기 스에지(葛城末治)는 한국 금석문에 대한 개설적 연구와 낙랑-고려의 주요 금석문에 대한 연구를 묶어 1935년에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를 펴냈다.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도 일제시기 주요한 금석문 연구자였다.

해방 이후에 황수영(黃壽永)의 『한국금석유문』, 이난영(李蘭暎)의 『한국금석문추보』, 허흥식(許興植)의 『한국금석전문』은 기존의 자료집에서 빠진 자료와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을 보완하여 금석문 자료를 집대성하였다. 또한 김용선(金龍善)은 『고려묘지명집성』을 펴내 고려 묘지명들을 모았고, 조동원(趙東元)은 일부 지역의 금석문 탁본을 모아 『한국금석문대계』를 편찬하였다.

최근에는 지방 자치단체가 지방사를 정리하면서 그 지역 금석문 자료를 실사하고 또 탁본을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연구자들이 탁본의 정리, 판독문 제시에서 한 걸음 나아가 판독문의 정밀한 비교와 번역, 주석 작업을 행하고 있다.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의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이지관(李智冠)의 『교감 역주 역대고승비문』 등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또한 사학에서는 금석 자료의 역사적 의미를 정밀하게 판독하고, 금석 자료로 남아 있지 않은 묘지명에 대한 연구도 진행시키고 있다.
형성기 한문학과 금석문
한문학사에서 형성기에 해당하는 전삼국시대와 삼국시대 초기의 자료는 매우 드물다. 그런 까닭에 408년(광개토왕 18)의 「덕흥리고분묘지명(德興里古墳墓誌銘)」과 414년(장수왕 3)의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초기 산문문체의 변천을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덕흥리 고분은 408년(광개토왕 18)에 만든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이다. 고분 벽면 56개소에 600여 자의 묵서가 있는데, 묘지문과 벽화설명문으로 나누어진다. 묘지문은 돌방 전실에서 후실로 들어가는 통로 입구(전실 북벽 상단) 위에 가로 49.7-50.5cm, 세로 21.5-22.8cm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기술하였다. 14행 154자로,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고향, 역임한 관직, 나이, 무덤에 묻힌 날자,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묘지명은 다음과 같은 문체적 특징을 지닌다.
① 전체 구조는 墓主의 출생과 관력, 죽음과 장례, 축원[후손의 번영과 영화], 결어[묘지명 작성 이유]의 4부분으로 되어 있다. 축원[후손의 번영과 영화]의 부분이 긴 것은 후대의 묘지명과 다르다.
② 문장은 4언의 齊言을 골간으로 한다. 하지만 화려한 어사를 중첩하고 대구의 형식으로 이어나가는 변려문의 문체가 아니다. 물론 고문(古文)[당송고문]의 형식도 아니다. 불교산문의 문체와 유사하되, 허사나 개사를 거의 쓰지 않았다.

이러한 문체적 특징은 「광개토왕릉비」의 그것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은 ‘무서운 문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다. 고 민영규 선생은 “광개토왕의 죽음을 ‘안가기국(晏駕棄國)’으로 장엄(莊嚴)했을 때, 나는 이미 범용(凡庸)한 사조(司藻)가 아님을 탄복했다. 비려국(碑麗國)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전렵이환(田獵而還)’은 상서(尙書)의 세계를 소요(逍遙)케 했다. 어느 한 구절(句節), 전후 사방으로 치밀하게 그 역학관계가 계산되지 않은 구석이 없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전체 구조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서(序)가 있고 기(記)가 있다’고 지적하고 기(記)의 부분을 다시 7단으로 나누었다. 위당은 “서(序)는 한인(漢人)이 명(銘)의 앞에 놓았던 것과 같지만, 기(記)로 이어서 명(銘)에 해당시켜 대왕의 전공을 서술하였다는 점은 옛 금석문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최근까지 역사학자들은 그 글을 3부분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심호택 님은 5단락으로 나누고 각각의 문체를 구별하였다. 제1단락은 선왕의 창기(創基), 제2단락은 광개토대왕의 제왕적 모습 총괄, 제3단락은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4단락은 수묘인연호(守墓人煙戶), 제5단락은 수묘인연호 규정과 그 근거를 다루었다고 하였다. 사실 이 비문의 전체 구조는 위당의 설을 근거로 하면서 4단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곧, 전체는 서(序)와 기(記)로 나누되, 기(記)의 부분은 다시 본사(本詞), 광개토왕의 수묘(守墓) 유언, 후사왕의 유언 집행 결의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이 지닌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서(序)는 출생의 신이한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본사는 광개토왕의 정벌 공적을 서술하였다. 축원의 부분이 없고, 수묘 유언과 후사왕의 유언 집행 결의를 적은 것은 후대의 묘지명과 다르다.
② 명(銘)의 부분에 해당하는 사(詞)가 운문이 아니다. 전체 문장은 고문의 형식이다. 4언 제언(齊言)을 골간으로 하지 않았고, 화려한 어사를 중첩하고 대구의 형식으로 이어나가는 변려문의 문체도 아니다. 허사나 개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였다.
③ 어휘의 선택이 매우 신중하여, 전고가 있거나 근거가 있는 말들을 선별하였다. 또한 명명법에서 포폄의 의식을 반영하였다.

「덕흥리고분묘지명(德興里古墳墓誌銘)」과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의 문체는 사조(詞藻)와 편장구조(篇章構造)의 면에서 크게 다르다. 하지만 한문의 문체로 말하면 문언 산문체의 어법을 따랐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형성기의 묘지명과 산문 일반의 문체를 파악하려면, 그 시기에 영향을 주었던 관구검(毌丘儉)의 「불내성기공명(不耐城紀功銘)」, 당나라 태종(太宗)의 「주필산기공비(駐蹕山紀功碑)」, 소정방(蘇定方)의 「평백제탑비명(平百濟塔碑銘)」 등도 함께 논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형성기에는 이두식 문체로 한문을 적은 일도 많았을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이두식 문체로 적혀 있는 금석문 자료로는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 있다. 임신년 6월 6일에 두 사람이 함께 3년 동안 충도(忠道)를 지키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나라를 위하여 적극 나설 것을 맹세한 사실,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3년 동안 『시경』, 『상서(尙書)』, 『예기』 등을 차례로 습득하자고 맹세했던 사실을 기술하였다.

이 비문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552년(진흥왕 13), 612년(진평왕 34), 672년(문무왕 12), 732년(성덕왕 31)의 설이 있다. 문장이 우리말식의 한문체여서 통일기 이전에 비문을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하지만 우리말식 한문체는 남북국시대나 고려 때에도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 문체를 기준으로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淂誓若國不安大乱世可□」
行誓之 又別先□未年七月廿二日大誓」
 詩尙書□傳倫淂誓三年」

한편, 654년(의자왕 14) 제작으로 추정되는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에는 사육변려체의 문장 형식이 드러나 있다. 화강암 비로, 높이 102cm, 폭 38cm, 두께 29cm의 크기가 남아 있는데, 정간(井間) 속에 4행 56자가 새겨져 있다. 사택지적이란 인물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이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祇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貇含聖明以」

이 비문에서 사육변려체를 연상시키는 부분을 보면, 구법은 변려체의 형식을 따랐지만 압운은 지키지 않았다. 평수운에 의하면 還은 평성 先운, 塔은 입성 合운, 雲은 평성 文운이다. 여러 상고음 분부설(分部說)을 고려한다고 하여도, 그 세 음은 압운하였다고 볼 수 없다.
慷身日之易往, 慨體月之難還.
穿金以建珍堂, 鑿玉以立寶塔.
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
峩峩悲貇, 含聖明以□□.

이상에서, 조선한문학 형성기에 한문문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활용하였으리라 추정할 수가 있다.
① 4언 중심의 문언문
② 선진고문에 토대를 둔 문언문
③ 이두식 한문
④ 사육변려문을 지향한 문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