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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의 자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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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의 정의
금석문은 금속에 새겨진 금문(金文)과 돌에 새겨진 석문(石文)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금문은 금, 은, 금동, 청동, 철 등의 금속으로 만들어진 각종 용기나 무기·인장·조상(造像)·범종(梵鐘) 등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말한다. 석문은 돌로 된 여러 조형물이나 자연 상태의 암벽 등에 문자가 새겨진 것을 가리킨다.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는 갑골·목간·토기·기와·벽돌 등에 새겨진 문자까지도 금석문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금석문에 대해 폭넓게 정의를 내린다면 종이로 된 책으로 엮어진 문자 자료, 즉 ‘문헌’과는 구별되는 문자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금석문의 종류
금석문은 어떤 소재로 되어 있느냐, 어떤 목적으로 쓰여졌느냐, 또 어떻게 쓰였느냐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재에 따른 분류를 기초로 한 위에서, 작성 목적과 명문의 작성 방법을 종합적으로 감안한 분류가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 입각해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금석문 자료를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대사 관련 금문에는 불상 조상기, 금동판, 사리봉안기, 사리기함, 칼, 은제 팔찌, 동경, 범종 명문 등이 있다. 석문에는 비문, 석각, 지석, 표석, 묘지명, 조상기 등이 있다. 금문과 석문 이외에 고분벽화 등에 쓰인 묵서와 목간, 죽간, 칠기명, 봉니(封泥, 인장명), 와전명, 토기명 등이 확인된다. 특히 목간은 실용적인 목적에서 가감없이 기록된 당해 시대의 생생한 문자자료라는 점에서 고대사 연구의 주요 자료로 부각되고 있다. 고대사 관련 금석문 자료에서는 석문 중 비문이 많으며, 신라의 것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고려시대 금석문도 석문이 절대량을 차지하며, 석문 중에서도 묘지와 탑비가 전체의 70~80%를 차지한다. 승려들의 탑비는 세워졌는데, 귀족이나 고급관료의 무덤에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고 무덤 속에 묻어두는 묘지만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묘지와 탑비 이외의 석문으로 사찰비, 경장비(藏經碑), 신도비, 묘표, 사리비, 석종비, 전비(殿碑), 능비, 묘비, 마애비, 석표(石標), 석등기, 석각 등이 있으나, 비중은 매우 낮다. 금문의 경우는 종명, 금구(禁口), 향완, 향등, 향합, 조상, 금동사리기, 당간기, 시책(諡冊), 청동정병, 발라, 동인합, 은제명, 청동완 등이 있으나 새겨진 명문이 무척 간결하다. 이처럼 고려시대 금석문은 대부분 불교관계 자료이다.

조선시대에는 금석문의 양이 증가하나, 유교관계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탑비는 서서히 퇴보하는 대신 선조나 부모에 대한 효성의 하나로 분묘를 화려하게 축조하고 비갈(碑碣)을 신분에 맞게 세우는 것이 성행한다. 국왕의 신도비도 세워지고, 황산대첩비나 명량대첩비와 같은 특수한 사실의 사적비가 세워진다.

시기별로 유행하던 금석문의 종류를 형태와 내용에 따라 간단히 언급했지만,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금석문의 대다수는 비문이다. 대개 국왕 이하 지배층의 훈적을 찬양하는 송덕문의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묘지는 묘주를 분명히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주인공의 성명, 행적, 선계(先系)와 후손 등을 금석자료에 기록함으로써 광중에 묻은 것이다. 묘지는 양적으로도 제일 많이 전해오고 땅속에 묻혀있어 풍화작용에 의한 마모가 거의 없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많은 양의 묘지가 제작되었다.
금석문의 특징, 동시성과 단편성
로마의 비문과 파피루스는 로마 역사의 복원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진한제국의 등장 이래 죽간·목간, 묘지석을 비롯한 각종 석각 자료가 중국의 역사 연구를 풍성하게 하였고, 일본에서는 철검 명문을 비롯하여 8세기경의 정창원(正倉院) 문서와 목간이 나라(奈良)시대의 연구를 다채롭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금석문은 역사 연구에서는 물론 당시의 문학, 어학, 생활습속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문헌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서는 금석문의 내용이 새로운 이해 방향을 제시하는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금석문 자료는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금석문이 자료로서 가지는 특징은 먼저 작성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동시성’을 지적할 수 있다. 사서로 대표되는 문헌자료가 대체로 사건이 발생한 시점보다 후대에 정리된 자료임에 비해 금석문 자료는 대부분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벌어지던 시점 또는 그 직후에 작성된 자료이다. 따라서 후대인의 손길을 타지 않은 생생한 자료라는 점에서 전승과정의 왜곡이나 오류를 차단할 수 있다.

1차 사료로서 사료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는 반면, ‘단편성’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대체로 한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 또는 상황에 관한 정보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문헌자료처럼 한 시대의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후대인을 위해 남겨놓은 것이라기보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만든 것이므로 제한된 정보만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 반드시 기존 문헌자료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금석문의 수집 및 정리의 역사
우리나라 금석문의 수집과 연구는 조선 선조의 아들이자 서화가인 이우(李俁, 1637~1693)에서 시작되었다. 이우가 1668년(현종 9) 신라 진흥왕순수비부터 조선시대까지 전해진 금석문의 탁본 300종을 연대순으로 엮은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이 효시가 된다. 그러나 비문의 본보기가 되는 탁본의 일부만을 실었으므로 전문은 알 수 없다. 『대동금석첩』은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교수였던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소장품이 되었다. 그는 『대동금석첩』에서 조선시대의 것은 제외하고 앞 시기의 것만 재편집하여 1932년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라는 명칭으로 간행하였으며, 조선시대 금석문은 그 목록을 『대동금석서목(大東金石書目)』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해에 간행하였다.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도서관 소장 『대동금석서목』
금석학이 큰 발전을 보이게 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청에 왕래한 실학자들이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곳 고증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금석문 수집에 관심을 가지고, 역사학의 보조학문으로 금석학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 대표적 인물로서, 황초령과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순수비를 판독, 해설하여 1852년(철종 3)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간행하였다. 이밖에도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이 1858년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금석문 목록과 판독문을 모아 실은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을 간행하였다. 또한 청에 유출되었던 우리나라 금석문의 탁본이 청의 학자에 의해 판독, 정리되었다. 1832년 유연정(劉燕庭, 1794~1852)이 편집하고 아들 유승간(劉承幹)에 의해 보편과 보록이 추가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 그것이며, 나진옥(羅振玉)의 교정으로 1922년 간행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서는 일제에 의해 신라 금석문의 수집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02년부터 동경제대와 조선총독부의 주관 아래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조선고적조사사업과 함께 실시되어 1917년까지 진행된 결과가 1919년 금석문 총서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으로 간행되었다.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1913년부터 본격적으로 신라 금석문을 조사하면서 신라 진흥왕순수비에 주목하였다. 그는 1916~1917년에 북한산과 창녕의 진흥왕순수비와 척경비를 조사한 다음 1918~1922년 이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가쓰시로(葛城末治)는 1921년부터 <조선금석문>, <조선금석문개설>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금석문에 대한 학문적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1935년 『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한국금석문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 연구서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고대 및 고려 사회의 이면에 흐르는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문헌자료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1차자료로 금석문을 이용하였다. 고려시대의 묘지는 일제 강점기와 국권회복 후 많이 발견되어 국립박물관과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를 판독하고 『조선금석총람』에 실리지 않은 금석문자료를 정리하여 이난영이 『한국금석문추보』(1968)를 간행하였다. 허흥식의 『한국금석전문』(1984)에는 고대부터 고려말까지의 금석문 총 549종이 수록되었다. 1967년 『한국금석유문』을 간행한 바 있는 황수영은 해방 이후 1990년대까지 발견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금석문 470개를 정리, 보완하여 『금석유문』(1999)으로 재간하였다. 금석문에 대한 판독과 역주 작업도 이루어졌는데 고대 금석문에 관한 역주서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1·2·3권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