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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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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지
현대적인 의미에서 지리서가 지역의 자연지리적, 인문지리적 특성을 정리한 책이라고 한다면, 전통시대 지리지(地理志)에도 그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지리지는 땅 혹은 지리 지식에 관한 기록을 가리키기도 하고, 특정 지역의 지리정보와 지리현상에 대한 종합적인 기록을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지가 전통시대의 산물인 한, 그 지식은 도덕으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리지는 그런 점에서 근대적 지리서의 전사(前史)로 축소시킬 수 없는 독자적인 의미가 있다. 지리적 범주에 따라서는 전국지리지와 읍지(邑誌)로 읍지는 다시 도지(道誌), 군현읍지(郡縣邑誌), 동지(洞誌), 진영지(鎭營誌)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편찬 주체에 따라서는 관찬 지리지와 사찬 지리지로 구분할 수도 있다.
국가가 기획한 전국지리지 : 『동국여지승람』에서 『해동여지통재』까지
조선왕조가 창업기를 지나 수성기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할 몇 가지의 조건들이 있었다.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고 법전을 편찬하는 일도 그렇지만, 전국 지리지를 펴내는 일은 더욱 중요했다. 성종 때 시작된 전국지리지 편찬 사업은 중종 때 이르러서야 일단락되었다. 1530년(중종 25) 마침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부른다. ‘신증(新增)’이란 ‘새롭게 보완했다’는 의미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동국여지승람』이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숙종 때도 전국지리지를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1757년(영조 33)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홍문관이 주도하여 전국 각 군현에 일관된 편집지침을 하달하는 방식으로 『동국여지승람』 개정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영조(英祖, 1694~1776)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처음 한차례 읍지를 모은 뒤 다시 이은(李溵, 1722~1781)이 발의하여 다시 군현 읍지를 모았는데, 이때는 각 군현에 편찬 지침과 범례를 내려 보냈다. 1759년(영조 35)의 일이었다. 1765년(영조 41)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1760년(영조 36)에 모은 어람용(御覽用) 군현 읍지에 ‘여지도서(輿地圖書)’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조에게 올렸다. 어람용이란 임금에게 올리는 책자를 가리킨다.

『여지도서』는 통일된 지침에 따라 편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읍지 앞에 각 군현의 지도를 붙였다는 점에서도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전국의 모든 군현을 망라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 또한 분명했다. 정조(正祖, 1752~1800)가 전국 모든 군현을 망라하는 새로운 전국 지리지를 펴내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조가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한 것은 1788년(정조 12)이었다. 정조는 이 해 규장각을 통해 전국 각 군현에 읍지를 올려 보낼 것을 명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도록 가시적인 성과는 나오지 못했다. 정조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군현 읍지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대신 비변사에 소장된 군현 읍지를 가져다 범례를 정하고 편집하도록 했다.

18세기가 전국지리지 편찬이 활발한 시대였다면 19세기는 도별 지리지, 즉 도지(道誌) 편찬이 시도된 시대였다. 19세기 이래로 군현 읍지들에서 특별히 강조되기 시작했던 것은 읍사례(邑事例)다. 읍사례란 통치와 행정에 활용할 수 있는 각종 수치와 데이터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흥선대원군이 편찬을 주도한 1871년(고종 8)의 군현읍지도 그런 추세를 잘 반영한다. 읍사례가 중심이 된 군현 읍지가 다시 편찬된 것은 갑오개혁 때에 이르러서였다.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개인이 편찬한 사찬지리지와 지리서들
전국지리지 편찬 명에 따라 여러 벌의 동일한 읍지가 만들어졌고, 그 중 일부가 해당 도 혹은 군현에 남아 이후 현지에서 편찬되는 읍지들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여지도서』의 편찬과정에서 읍지도가 첨부된 군현읍지는 감영 보관본으로 한 벌이 남게 되었고, 해당 군현에서도 동일한 읍지의 사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정조대 『해동여지통재』의 편찬과정(1788년, 정조12)에서도 새로운 읍지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현지 군현에 남아 이후 읍지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전국지리지 만큼이나 조선후기 읍지 편찬에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찬 읍지(私撰邑誌)들이다. 사찬읍지 편찬은 이미 17세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이 읍지들이 현지에 남아 지역 읍지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18,19세기에 편찬된 해당 군현 읍지에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들 중에는 역사지리를 탐구하거나 실학적 지리서를 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17세기 지식인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은 역대의 역사서나 지리서에서 국가의 강역, 수도, 관방 관련 지명의 위치가 일정하지 않은 것을 바로잡기 위해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편찬했다. 18세기 지식인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살만한 곳을 찾아 헤맨 과정에서 얻은 지식을 『택리지(擇里志)』라는 이름의 책자에 녹여냈다.

도로에 대한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각 지역(군현)간의 거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도리표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리표(道里表)가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으면서 그것을 활용한 다양한 형식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의 산줄기와 물줄기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작업도 이어졌다.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산수고(山水考)」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에서 관련 연구에 물고를 텄다. 이후 산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와 물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가 독립적으로 편찬된다. 『산경표(山經表)』는 전자를,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대동수경(大東水經)』은 후자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산경표』에서 우리나라 산줄기는 1개의 대간(白頭大幹), 1개의 정간(長白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맥들은 대부분 물줄기들에 의해 나뉘는 곳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그것이야말로 산으로 나뉘고 물로 합쳐지는 하나의 생활권이 고려된 결과이다. 족보 형식을 도입한 『산경표』는 그 형식으로 인해 산줄기의 위계와 연결 관계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었다.
동양문고 소장 『함경북도길주목읍지(咸鏡北道吉州牧邑誌)』
관찬 전국지리지에서 기원한 사본들
버클리대학 아사미문고에 소장된 지리지 중에서는 『여지도서』의 체제를 따르는 것들이 있다. 『동복읍지』와 『단양읍지』는 각각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편찬된 읍지인데, 얼마간의 편차는 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 『여지도서』의 체제를 따른 것들이다. 『여지도서』가 편찬되면서 지역에 부분이 남아 이후 해당 군현 읍지의 저본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단양읍지』에 행정과는 무관한 인문적 내용이 풍부한 것은 이 읍지의 편찬과정에서 지역 사족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한다.
사찬지리서에 기원한 사본들
『서흥지(瑞興志)』(버클리 소장)는 서흥부사 박사창이 1735년(영조 11)에 펴낸 것을 저본으로 하여 신상현이 1828년(순조 28)에 편찬한 것이다. 박사창이 처음 『서흥지』를 편찬했을 때 비변사나 홍문관으로부터 별도의 지침이 내려간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읍지는 기본적으로 17세기부터 활성화된 사찬지리지 편찬의 흐름을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광읍지(靈光邑誌)』(버클리 소장)는 1891년 이후에 편찬된 읍지이다. 당시 관찬 전국지리지의 일환으로 제작된 읍지들은 읍사례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지만, 이 읍지는 그것들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 한다. 읍지의 앞부분에 비교적 충실한 군현지도가 붙어 있으며, 일부 항목은 매우 독특하면서도 내용이 풍부하다. 편찬자는 물산 항목에서 216가지의 세부 분류 품목을 나열하는가 하면, 과일과 화초류 채류를 구분하기도 하고, 금류와 수류, 민물고기와 바닷고기를 구분하기도 했다. 편찬자는 또 고적조에서 군현의 연혁에 관해 독자적으로 탐구한 결과를 담기도 했다. 읍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읍지의 형식에 연연하지 않고 편찬자의 문제의식과 개성을 충분히 구현한 것이다.

『성천읍지(成川邑誌)』(버클리 소장)는 이상의(李尙毅, 1560∼1624)가 1602년에 펴낸 『성천지』를 계승한 사본인데, 첫머리에 「성천폭원총도」, 「성천강선루도」, 「선천관부도」 등 3종의 지도를 첨부한 읍지다. 『성천지』는 성천부사로 부임한 이상의가 지역에 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다. 『성천읍지』는 그런 『성천지』를 계승한 것이므로, 17세기 사찬읍지의 전통을 충실하게 이어받은 것이라 할 만하다. 이상의는 뒷날 남인실학파의 거두가 되는 이익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동여비고(東輿備考)』(버클리 소장)는 고종 초에 편찬된 경도와 한성부에 대한 지리지이다. 상하 2책으로 되어 있는데, 1책은 경도, 2책은 한성부에 대한 설명이 있다. 『동국여지비고』와 내용상 거의 동일하지만, 편찬 시점은 이 사본이 조금 앞선다. 서울에 관한 종합적인 지리서로서 사료적인 가치가 크다. 버클리대학 아시미 문고에는 이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군현읍지가 소장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한백겸의 『동국지리지』(RICH_0371)를 비롯하여, 정약용이 쓴 『강역고』의 사본(『아방강역고』),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사본(『팔역지』)도 눈에 띤다.

동양문고본 중에도 적지 않은 지리지 혹은 관련 지리서들이 눈에 띤다. 버클리의 문고와 마찬가지로 군현읍지가 적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도 두 질이 있다. 그러나 버클리 문고에 비하면, 군현읍지뿐만 아니라 각종 지리서들이 더 풍부한 편이다. 『정리표』 두 질(TOYO_0967, TOYO_1131), 그리고 『해동도리표』(TOYO_1121)와 『대한십삼도정리표』(TOYO_1074)는 18세기말부터 편찬되기 시작한 도리표가 대한제국시기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리표』((TOYO_1236)와 『산경표』(TOYO_1264)는 조선광문회에서 도리표와 함께 펴낸 것이다. 조선후기에 유행한 도리표와 산경표가 1910년대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중환의 저작인 ‘택리지’의 사본들도 여럿이다. 『동국산수록』(TOYO_0981)과 『택리지』(TOYO_1020), 그리고 또다른 『택리지』(TOYO_1084)는 모두 ‘택리지’의 사본들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지리소지』(TOYO_1253)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1885년 청나라에서 간행한 것이다. 『동국지리지』(TOYO_1198)는 한백겸의 저작을 뒷 시기에 간행한 것이며, 『대한강역고』((TOYO_1060)은 정약용의 강역고를 보완한 장지연의 저작이다.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 『서흥지(瑞興誌)』
버클리대학 및 동양문고 소장 지리지의 사료적 가치
버클리대학 및 동양문고 소장 한국 고전적 중 지리지는 공히 군현 읍지가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이 군현읍지들 중에는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처럼 관찬 지리지의 형식을 따르는 것들도 있지만, 17세기 이래로 활발하게 편찬되었던 사찬 지리지를 계승하고 있는 것들이 많은 편이다. 관찬 지리지가 국가가 필요한 특정한 형식에 따라 제작된 반면, 사찬 지리지는 편찬자의 문제의식과 지역을 보는 안목을, 더 나아가 지역의 실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동양문고에 『도리표』 『산경표』, 『택리지』, 『강역고』 등 각종의 지리서들과 그 사본들이 소장되어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이런 유형의 지리서들은 전국지리지나 사찬읍지와는 다른 체제, 다른 형식으로 전통 지리지식을 전해 준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있다.

버클리대학 및 동양문고 소장 지리지 중에는 『서흥지』처럼 유일본으로 추정되는 것들도 있으며, 『동여비고』처럼 지역의 지리정보를 상세히 전해주는 사본들도 있다. 적지 않은 소장본들은 전후에 편찬된 다른 사본들의 이본이거나, 다른 사본들의 정보를 기초로 증보된 것들이다. 이본이라면 이본간의 비교연구에, 증보본이라면 지역의 실정을 전해주는 지리지 간의 시계열적 편차를 확인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리지는 지역의 지리정보를 담은 기록이지만, 거기에는 정치-행정적 요구와 지역사회의 인문적 요구가 투영되어 있다. 조선초기 이후 식민지시기까지 전통적인 형식의 지리지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와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등은 조선에서 그런 지리지들을 수집했다. 그것들이 지금 버클리 대학 및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지리학발달사를 온전하게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이 지리지들을 국내외에 소재한 다른 사본들과 비교연구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