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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설첩(砮舌帖)』, 추사 김정희의 친필 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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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설첩』은 추사 김정희가 자신의 자작시 <석노시(石砮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중국에서 수입한 서첩에 친필로 쓴 것이다. 김정희가 말년에 과천에서 생활하던 때의 작품이다.
ㆍ서명: 노설첩(砮舌帖)
ㆍ저자: 김정희(1786~1856) 자서(自書)
ㆍ서지사항: 절첩본(折帖本) 1책; 22.1*12.8cm, 총 154cm
ㆍ표지 제첨: 砮舌帖 乙卯仲秋 硏仙藏 〔韋堂〕
ㆍ장서인: 한서(漢舒), 위당(韋堂), 추사(秋史), 김정희인(金正憙印)
ㆍ현소장처: 경도대학 다니무라문고(谷村文庫)
ㆍ청구기호: 8-43ト 貴
다음은 『노설첩』의 표지와 전체 22면의 이미지이다.
<표지>
제 1-2면
제 3-4면
제 5-6면
제 7-8면
제 9-10면
제 11-12면
제 13-14면
제 15-16면
제 17-18면
제 19-20면
제 21-22면
마지막 면
편저자사항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가(書家)이자 문인화가이며 경학가(經學家)이다. 일찍이 사행(使行)하는 부친 김노경(金魯敬,1766-1837)을 따라 청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완원(阮元,1764-1849),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스승으로 삼았다. 귀국 후에는 편지를 통해 이들의 지도를 받으며 청대 학술 연구에 진력하였고, 마침내 조선에서 북학(北學)의 종장이 되었다. 고증학 연구의 대가로서 특히 조선 금석학 연구의 개창자가 되었다. 금석학에 대한 연구는 한예(漢隸)를 바탕으로 한 추사체 출현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론에도 조예가 깊어 옹방강의 시론을 조선에 유행시켰다. 그의 고증학은 그림에도 적용되어 <세한도>, <불이선란> 등을 남겼다. 완원이 직접 편찬한 『황청경해』 및 옹방강의 저술 등을 통해 경학(經學)에도 깊은 연구를 하였으나 저술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저술을 불태웠으나 후학들이 시문(詩文)을 모아 전사자(全史字)로 『완당척독』,『담연재시고』, 『완당집』 등으로 간행하였다. 1934년에는 이를 종합하고 증보한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 금석학 연구서로서 『예당금석과안록』,『해동비고』가 있고, 두보의 7언 절구를 편집한 『시암녹정두소릉칠언절구』를 직접 편간하기도 했다.
구성 및 내용
1책의 필사본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서첩에 필사했는데, 표지는 문양이 들어간 비단으로 되어있다. 표지 제첨은 ‘砮舌帖 乙卯仲秋 硏仙藏 〔韋堂〕’이라 해서 따로 붙였다. 본문은 1면당 3행으로 줄을 치고 그 위에 글씨를 썼다. 먼저 ‘荊梁舊貢皆貢砮’로 시작되는 <석노시(石砮詩)>가 16면에 걸쳐 필사되어 있다. 시가 끝난 뒤에는 ‘石斧石鏃, 每出於靑海之土城, 土人以土城爲肅愼古蹟, 賦此.’라는 소서가 붙어 있고, 마지막에는 ‘노완(老阮)’이란 관지와 함께 〔秋史〕,〔金正憙印〕 등 인장 두 방이 찍혀 있다. 이 시는 김정희가 북청 유배시절에 지은 것인데, 『완당선생전집』권9에 그대로 실려 있다. 다음에는 <영백설조(詠百舌鳥)> 3수와 <병서(並序)>가 6면에 걸쳐 필사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1면당 3행으로 줄을 치고 그 위에 글씨를 썼다. 마지막 면은 종이가 부족하자 뒤쪽 표지 안쪽에 남아 있는 여백지에 썼다. 끝에는 <석노시>에 찍은 인장과 동일한 〔秋史〕인이 찍혀 있다. 맨 뒷면에는 『노설첩』의 소장자로 보이는 인물의 인장 〔漢舒〕,〔韋堂〕 두 방이 찍혀 있다. 표지 제첨의 인장과 동일하다. 『노설첩』은 바로 <석노시(石砮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에서 한 글자씩 가져다 책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노설첩』의 작성 시기는 마지막의 ‘하손전사(下潠田舍)’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완당논동파서첩>에 ‘과주(果州) 하손전사에서 썼다’는 기록을 통해 ‘하손전사’가 과천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손전사가 김정희의 서재인지 다른 사람의 서재인지는 알 수 없다. 김정희는 1852년 8월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나 과천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이 글씨는 김정희가 해배된 1852년 가을 이후에 썼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가 『노설첩』을 누구에게 써주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표지 제첨에 있는 ‘硏仙藏 〔韋堂〕’과 맨 뒷면의 인장 〔漢舒〕,〔韋堂〕을 종합하면 ‘硏仙’, ‘漢舒’, ‘韋堂’과 관련 있는 인물이 소장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보 부족으로 누구인지 확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김정희의 글씨를 후대에 장첩한 게 아니라, 원래의 서첩에 쓴 점을 고려하면 제첨의 ‘乙卯仲秋’은 1855년 8월로 추정된다. 김정희가 『노설첩』에 글씨를 쓴 것도 이와 동일한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노설첩』은 북청 유배에서 돌아온 김정희가 1855년 8월 이전에 과천에서 썼을 것으로 보이는 서첩이라 할 수 있다.
자료가치
『노설첩』에 실린 시들은 <석노시(石砮詩)>와 <영백설조(詠百舌鳥)>란 이름으로 문집에 실려 있다.(『覃揅齋詩稿』와 『阮堂先生全集』에 모두 실려 있다.) 또한 <석노시>는 호암미술관『韓國의 美 17 – 추사 김정희』(중앙일보사, 1981)에 <石砮歌>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영백설조>는 간송미술관에 각각 또 다른 본이 전하고 있다. (『秋史精華』(간송미술관, 지식산업사, 1983)에 실려 있다. 그런데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장첩상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2수와 3수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고, 시와 병서(並序)도 섞여 있다. 최근에 간행된『秋史名品』(최완수, 현암사, 2017)에는 제대로 정리되어 실려 있다.

먼저 <석노시>를 살펴보자. 『노설첩』의 <석노시>를 문집이나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석노시>와 비교해보면 내용상 차이가 있다. 문집이나 호암미술관 소장본에는 시가 끝나갈 무렵에 ‘石不自言又不欵,耶賴山色空濛濛,長爪疾書亦不錯,長平箭頭古血紅’이 있지만, 『노설첩』의 <석노시>에는 누락되어 있다. 끝부분의 병서(並序) 역시 호암미술관 소장본에는 ‘土人以土城爲肅愼古蹟,作此. 阮堂老人書贈金生如筠’이라 했는데, 『노설첩』의 <석노시>에는 ‘土人以爲肅愼古蹟, 賦此. 老阮’으로 되어 있다. 각기 다른 사람에게 서준 것이다.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석노시> 역시 줄친 종이에 썼고, 서풍 또한 『노설첩』의 <석노시>와 아주 유사하다. 이를 통해 볼 때, 문집의 <석노시>는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석노시>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면 『노설첩』의 <석노시>는 약간의 축약된 감이 있다. 당연히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석노시>보다 늦은 시기에 필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권돈인이 1856년 6월에 쓴 <석노시>도 따로 전하고 있다. <석노시>는 김정희가 석노(石砮)에 대해 고증한 내용을 시로 쓴 것이다. 이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석노(石砮)에 대한 글들을 썼지만, 부족하다고 여긴 김정희가 자신의 생각을 다시 쓴 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음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살펴보겠다. 이 역시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다만 문집에 실린 병서(並序) 앞부분에는 ‘崔生所居南川川上,多百舌鳥,使求之,以此三詩爲媒.’란 글귀가 있는데 『노설첩』에는 생략되어 있다. 문집에 실린 병서의 내용을 보자.
최생(崔生)이 살고 있는 남천(南川)의 냇가에는 백설조가 많기에 그것을 구하게 하면서 이 시 세 수로써 매개를 삼게 했다. 백설조는 매번 하지(夏至)가 되면 소리가 없다가 동지(冬至)로부터 비로소 소리를 내니 이 또한 양조(陽鳥)이다. 한 음(陰)이 생긴 뒤로 소리가 없는 것은 마치 음양(陰陽)과 더불어 서로 소식(消息)하는 것 같으니 보통 새에게는 없는 것이다. 이전 사람들이 백설조를 두고 지은 시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고, 도리어 백설조를 나무라는 내용만 들어 있다. 나는 깊이 느끼는 바 있어 백설을 위해 이 원사(寃詞)를 지어 풀어준다. (金正喜, 『阮堂先生全集』권10, <詠百舌鳥 並序○三首>. “崔生所居南川川上,多百舌鳥,使求之,以此三詩爲媒.百舌每夏至無聲,自冬至始聲,是亦陽鳥也.一陰生後無聲者,似若與陰陽相消息,凡鳥之所未有也.前人賦百舌者,未有及此,反有譏之者.余深有所感, 發爲作此寃詞以解之.”)
간송미술관 소장본에도 병서가 남아 있다. 문집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다르다.
백설조는 동지에 처음으로 소리를 내다가 하지면 마침내 소리가 없어진다. 이는 양조이기 때문이다. 일음(一陰)이 생겨난 뒤로 소리가 없어지는 것은 감발(感發)케 하는 게 있는데도 이전 사람들은 이 뜻에 대해 언급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도리어 말이 많다고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너무 안타깝다. 내가 특별히 이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준다. 게다가 내가 살고 있는 곳의 가까운 들에는 이 새가 많이 있다. 촌아이들로 하여금 이 시를 매개로 삼아 구하면 새들이 반드시 기뻐하며 친밀하게 오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노완(老阮)이 언(彦, 商彦으로 추정, 김정희 문집에는 <次兒輩送商彥韻>,<上元芻靈示商彥>, <戲次商彥 三首> 등 상언(商彦)과 관련된 시들이 실려 있다. 상언은 집안 조카뻘인 김상언(金商彦,1832-1860)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언은 김원희(金畹喜)의 아들인데, 그의 동생 김상념(金商念)은 김정희의 동생 김명희의 양자가 되었다. )의 수장을 위해 쓴다. 하손전사(下潠田舍)의 봄날에. (百舌冬至始有聲, 夏至遂無聲, 是陽鳥也. 一陰生後無聲者, 有足以感發, 前人竟無一及於此義, 反有譏誚其多舌, 甚可慨也. 余特爲此解. 且所居近野多此鳥, 使邨童輩, 以此詩爲媒而求之, 鳥必有喜而來親者耳. 老阮書爲彦收. 下潠田舍春日.〔阮堂印〕)
김정희는 이를 보면 이전사람들이 백설조를 소인의 새로 봤는데, 김정희는 군자의 새로 본다는 내용이다. 김정희가 <영백설조(詠百舌鳥)>를 여러 사람에게 써준 것도 백설조의 신세가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는 백설조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김정희가 원사(寃詞)를 지어 억울함을 풀어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노설첩』이 중요한 것은 김정희의 글씨를 가져다 장첩을 한 게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서첩에 이들을 함께 필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김정희 작품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김정희 말년의 것으로 여러 번 필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두 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생각에서 이를 바로잡고자 지은 글들이다. 김정희 말년의 심경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할 것이다. 서법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김정희 말년 행서(行書)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손정사에서 썼다는 기록을 통해 과천시절의 새로운 작품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참고문헌
金正喜,『覃揅齋詩稿』, 전사자본, 1867
金正喜,『阮堂先生全集』, 영생당, 1934
金正喜, 『阮堂論東坡書帖』, 탁본첩, 개인소장
黃 五,『綠此集』, 한성도서주식회사, 1932
간송미술관, 『秋史精華』, 지식산업사, 1983
이헌서예관,『이헌서예관명품특선2-추사유묵』, 2011
중앙일보사,『韓國의 美 17 – 추사 김정희』, 1981
최완수,『秋史名品』, 현암사, 2017

박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