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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1월 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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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들은 19세기 말 조보(朝報)로서 1892년(고종 29) 1월 1일부터 동월 29일까지 29일간 발간된 문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보는 조선시대 조정의 소식을 담은 소식지로서 기별지(奇別紙)ㆍ조지(朝紙)ㆍ저보(邸報)ㆍ저장(邸狀)ㆍ저지(邸紙)ㆍ난보(爛報)ㆍ한경보(漢京報) 등으로도 불렸다. 조보에는 국왕의 동정과 지시사항, 각 관서에서 보고한 내용, 관료들의 주요 발언 내용, 인사ㆍ포상ㆍ처벌 내용, 왕실 및 국가의례 등 조정에서 논의되는 주요 사건들이 기재되었다. 조보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행정사항을 전국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조보의 작성은 승정원에서 담당하였으며, 매일 작성하여 다음날 오전에 조보소(朝報所)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여기서 서리와 경저리들이 이를 필사한 후 기별군사(奇別軍士)들이 각지에 전달하였다. 서울 지역은 매일 발송하였고, 지방에는 4~5일치를 묶어 발송하였다.
조보는 조선 전기 이래로 고종대까지 계속해서 발행되다가 1894년 관보(官報)가 등장하면서 사라졌다. 관보는 1894년 6월부터 의정부(議政府) 관보국에서 발행하였다. 발행 초기의 관보에는 별도의 호수가 없었으며 문자는 한문을 사용하였다. 관보는 1895년 4월부터 1896년 10월까지는 내각기록국 관보과에서 발행하다가(1~452호) 1896년부터 10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총무국 관보과에서 발행하였다(453~3075호). 이어 1905년부터 1907년 6월까지는 의정부 관보과에서 발행하였고(3076~3793호), 1907년 6월부터 우리나라 자체적인 관보가 사라지는 1910년 8월까지는 내각법제국 관보과에서 발행하였다(3794~4768호). 이처럼 발행기관이 바뀐 것은 발행주체가 바뀐 것이 아니라 관보를 작성하는 관보과의 소속이 변한 것이었다. 한편, 통감부의 공보(公報)가 1월 14일부터 발행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시기부터 1910년까지는 한국과 일본정부에서 발행하는 두 종류의 관보가 존재하였다. 통감부공보는 3년 7개월 동안 167호까지 발간하고 1910년 8월 27일 폐간되었고, 동년 8월 29일부터 조선총독부관보로 대체되었다.
1892년 1월 1일 조보(朝報)
이 문서들은 조선시대 조보가 사라지기 직전에 발간된 것으로서 19세기 말 조보의 마지막 형태를 살펴보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이 조보에는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더욱 주목된다. 조보가 작성된 1892년은 동학교도들이 규합하여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冤)을 요구한 삼례집회가 열렸으며, 함경도와 강원도 등 지방의 여러 군현에서 백성들의 소요(騷擾)가 벌어지던 해이다. 외적으로는 일본과 청나라 외에도 서양세력들의 조선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대내외적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조보들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①번 문서는 1892년 1월 1일에 발행한 조보이다. 이날 조보에는 당일의 인사기록부터 시작하여 탐관오리를 처벌하기로 한 결정내용, 군병들을 운용하는 문제, 각종 포상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②번 문서부터 마지막 문서까지도 동일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들에서 알 수 있는 조보의 특징은 요일의 구분 없이 매일 작성되었다는 점과 국가행정 전반에 방대한 주제들이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서를 비롯한 연관된 조보를 모아서 분석한다면 해당시기 국가적 상황과 조정의 대응방식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조보들은 결락된 일자 없이 한 달 동안의 내용이 모두 남아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또한 조보는 조선시대 국가행정과 문서전달 체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사료이다. 지방군현에 전달된 조보가 어떠한 방식으로 향촌사회에 전달되고 활용되었는지 살펴본다면 조선시대 조보의 기능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의미 있는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문서의 목록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892년 1월 1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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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892년 1월 2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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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92년 1월 3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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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892년 1월 4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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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92년 1월 5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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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892년 1월 6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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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892년 1월 7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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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92년 1월 8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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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892년 1월 9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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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892년 1월 10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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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892년 1월 11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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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892년 1월 12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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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892년 1월 13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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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892년 1월 14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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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892년 1월 15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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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892년 1월 16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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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92년 1월 17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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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892년 1월 18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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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92년 1월 19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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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892년 1월 20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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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892년 1월 21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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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892년 1월 22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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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892년 1월 23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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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892년 1월 24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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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892년 1월 25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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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1892년 1월 26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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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1892년 1월 27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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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892년 1월 28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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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892년 1월 29일 朝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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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김경수, 「'朝報'의 발행과 그 성격」, 『사학연구』 58ㆍ59, 한국사학회, 1999.
집필자 : 임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