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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7-1760년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 지역 토지매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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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들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총 10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중반까지 동십리(東十里) 돌곶이(石串)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 노(奴) 산이(山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②1657년 사노(私奴) 산이(山伊)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③1657년 답주(畓主) 고(故) 판관(判官) 이주(李柱) 처(妻) 임씨(林氏) 함답(緘答), ④1657년 증인 신태해(申泰海) 필집 조석부(趙錫孚) 초사(招辭), ⑤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 노(奴) 산이(山伊) 토지매매(土地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 ⑥1758년 가선(嘉善) 변태희(卞泰禧)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⑦1760년 변태희(卞泰禧)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⑧1760년 재주(財主) 김시집(金始集) 초사(招辭), ⑨1760년 증인 정덕조(鄭德祖) 필집 변의서(卞義瑞) 초사(招辭), ⑩1760년 변태희(卞泰禧) 토지매매(土地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 등 총 10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 노(奴) 산이(山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위 문서 중 명문(明文)은 토지매매가 완료되었을 때 토지주인이 구매자에게 작성해준 증명서이고, 소지(所志)는 토지매매 후 입안(立案)을 발급받기 위해 관아에 올리는 청원서이다. 함답(緘答)은 관아로부터 신문(訊問)을 받을 사람이 직접 출두하지 않고 서면(書面)으로 올리는 진술서를 말하며, 초사(招辭)는 관아에서 진술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
이 문서들에서 거래되는 토지는 모두 동십리 돌곶이에 소재하였다. 동십리는 조선후기 경기(京畿) 양주목(楊州牧)에 소속된 면(面)의 이름이었다. 동십리는 도성(都城)에서 동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서 지금의 우이천(牛耳川)과 중랑천(中浪川) 일대에 해당했다. 동십리에 속한 돌곶이는 조선 경종(景宗)의 능(陵)인 의릉(懿陵)이 있는 곳으로 천장산(天藏山) 인근 지역이었다. 동십리면은 양주목 읍치에서 70리나 떨어져 있어서 도성과의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이로 인해 동십리에는 궁방과 중앙각사의 토지가 많이 소재하였고, 지역민들은 각종 잡역에도 자주 동원되었다. 또한 중앙정부의 관료나 도성(都城)에 거주하는 부자들도 도성 인접 지역인 이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서들은 도성(都城)에서 근무하는 내시(內侍)들과 일부 역관들이 동십리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고 상속하는 정황을 보여준다. 문서들은 성격에 따라 크게 2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①~⑤번까지 문서는 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이 사망한 이주(李柱)의 처(妻)인 임씨(林氏)에게 돌곶이 내 답(畓)을 매입하고 입안(立案)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승전(承傳)은 내시부(內侍府)의 정4품직인 상전(尙傳)이 맡았던 승전색(承傳色)을 의미하며 왕명 출납을 담당한 내관(內官)이었다. ①번 문서는 최승전댁 노(奴) 산이(山伊)가 토지를 매매하면서 받은 명문이며, ②번 문서는 매입한 답(畓)에 대한 입안을 한성부에 요청하는 소지(所志)이다. ③·④번 문서는 해당 토지매매에 대한 증인과 관련자가 진술한 문서이며, ⑤번 문서는 한성부에서 발급해준 입안(立案)이다. 이 문서들은 동십리 돌곶이 지역에 중앙관료, 특히 내관(內官)들이 토지를 매입하고 있던 정황을 보여준다. 또한 조선후기 토지매매 절차와 도성 인근 전답(田畓)의 시세, 매매가 지불 방법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⑥~⑩번까지 문서는 앞서 이주(李柱)의 처(妻)인 임씨(林氏)에게 매입한 최승전의 토지를 후손이 역관(譯官)이었던 변태희(卞泰禧)에게 매매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⑥번 문서는 변태희가 토지를 김시집(金始集)에게 사면서 받은 매매명문이고, ⑦번 문서는 매입한 토지에 대해 한성부에 입안을 요청하는 소지(所志)이다. ⑧·⑨번 문서는 토지매매와 관련된 자들의 진술을 담은 문서이고, ⑩번 문서는 한성부에서 변태희에게 발급해준 입안(立案)이다. 이 문서에서 주목되는 점은 토지의 매매가가 1657년(효종 8) 정은자(正銀子) 50냥이던 것이 약 100여년이 지난 1758(영조 36)년에는 정은자(丁銀子) 100냥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정은(正銀)과 정은(丁銀)의 순도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매매가가 인상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부를 축적한 역관들이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관리하던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변태희는 한학(漢學)으로 역과(譯科)를 합격한 역관 출신으로 이후에는 창덕궁위장(昌德宮衛將)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인 초계(草溪) 변씨(卞氏)는 대대로 역관으로 유명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변필화(卞三錫)와 할아버지 변삼석(卞三錫)도 역과에 합격한 역관이었으며, 18세기 초반 한양 최고 부자로 알려진 역관 변승업(卞承業)도 같은 집안 인물이었다. 특히 아버지 변필화와 큰아버지인 변기화(卞箕和)도 일찍이 동십리 돌곶이 일대의 토지를 매입한 경력이 있었다. 이 문서들은 역관(譯官)으로 부를 모은 변씨 집안의 동십리 일대 토지매입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 노(奴) 산이(山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이주(李柱) 처(妻)

임씨(林氏)

노(奴) 산이(山伊)

2

1657년 사노(私奴) 산이(山伊)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노(奴) 산이(山伊)

한성부(漢城府)

3

1657년 답주(畓主) 고(故) 판관(判官) 이주(李柱) 처(妻)

임씨(林氏) 함답(緘答)

이주(李柱) 처(妻)

임씨(林氏)

한성부(漢城府)

4

1657년 증인 신태해(申泰海) 필집 조석부(趙錫孚) 초사(招辭)

신태해(申泰海) 

-

5

1657년 최승전댁(崔承傳宅) 노(奴) 산이(山伊)

토지매매(土地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

한성부(漢城府)

노(奴) 산이(山伊)

6

1758년 가선(嘉善) 변태희(卞泰禧)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김시집(金始集)

변태희(卞泰禧)

7

1760년 변태희(卞泰禧) 입안(立案) 요청 소지(所志)

변태희(卞泰禧)

한성부(漢城府)

8

1760년 재주(財主) 김시집(金始集) 초사(招辭)

김시집(金始集)

-

9

1760년 증인 정덕조(鄭德祖) 필집 변의서(卞義瑞) 초사(招辭)

정덕조(鄭德祖)

-

10

1760년 변태희(卞泰禧) 토지매매(土地賣買) 사급입안(斜給立案) 

한성부(漢城府)

변태희(卞泰禧)

※ 참고문헌
『譯科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