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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725년 신창(新昌) 대북면(大北面) 홍성곶(洪城串) 토지매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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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들은 18세기 초반 신창현(新昌縣) 대북면(大北面)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708년 노(奴) 업인(業仁) 패지(牌旨), ②1708년 김필영(金必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③1725년 정두인(鄭斗仁)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④1750년 김만련(金萬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⑤1792년 김중창(金重昌)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등 총 5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문서들은 18세기 초반 신창현(新昌縣) 대북면(大北面)의 토지매매와 관련한 문서로서 ①1708년 노(奴) 업인(業仁) 패지(牌旨), ②1708년 김필영(金必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③1725년 정두인(鄭斗仁)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④1750년 김만련(金萬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⑤1792년 김중창(金重昌)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등 총 5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1708년 노(奴) 업인(業仁) 패지(牌旨)
조선후기 신창현은 충청도 아산현(牙山縣)과 예산현(禮山縣) 사이에 위치하였다. 군사적으로는 홍주진관(洪州鎭管)에 편제되어 절제도위(節制都尉)가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아산만을 통해 바로 서해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평야지대에서 생산된 세곡을 운송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홍성곶은 읍치 북쪽으로 삽교천 인근에 위치한 마을로서 논이 넓게 펼쳐진 지역이었다.
①번 문서는 상전(上典)이 노(奴) 업인(業仁)에게 홍성곶에 소재한 토지를 매매할 것을 지시하면서 작성해 준 패지(牌旨)이다. 이 문서에는 전답의 위치와 지목, 면적 등과 함께 이 농지가 새롭게 제방을 쌓으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②번 문서는 김필영(金必永)이 ①번 문서의 토지를 사면서 받은 매매명문이다. 답(畓) 12부 9속을 동전 40냥에 매입했음을 알 수 있다. ③번 문서는 위에서 매매된 토지가 17년이 지난 후 재차 매매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매매가가 이전보다 절반이나 떨어진 동전 20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④번 매매문서에서는 앞서 언급한 토지와 지번(地番)이 다르지만 ①, ②, ③의 문기(文記)와 패지(牌旨)를 함께 넘긴다고 하고 있다. ③번 매매가 성사된 이후에 새로 양전을 하면서 지번과 결부수가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⑤번 문서는 위 토지가 약 42년 후에 다시 매매된 기록으로서 이때는 매매가가 40냥에서 54냥으로 인상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본 문서들은 18세기 토지매매 방식과 시세 변동, 양전 사실 등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순서

자료명

발급

수취

1

1708년 노(奴) 업인(業仁) 패지(牌旨)

상전(上典) 오(吳)

노(奴) 업인(業仁)

2

1708년 김필영(金必永)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노(奴) 업인(業仁)

김필영(金必永)

3

1725년 정두인(鄭斗仁)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김후선(金厚善)

정두인(鄭斗仁)

4

1750년 김만련(金萬鍊)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정세태(鄭世泰)

김만련(金萬鍊)

5

1792년 김중창(金重昌)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전성선(全性善)

김중창(金重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