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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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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 1869-1943)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에서 판사로 근무했던 법조인이다. 우리나라에서 머무는 동안에 많은 양의 고서를 수집하였다. 직업의 영향으로 인해 법제사 분야에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가 수집한 자료 가운데에는 정치와 법률에 관한 고문헌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국에서의 활동과 고문헌 수집
1892년 7월 帝國大學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경에서 판사와 검사직을 역임했다. 1906년 6월에 통감부(統監府) 법무원(法務院) 평정관(評定官) 자격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이후 조선총독부 판사, 고등법원 판사를 재직했다. 아사미는 법관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법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 활동을 꾸준하게 병행하였다. 1909년에는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였고, 1916년에는 우리나라의 고적을 조사하는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의 위원으로 활동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매일신문 1916년 11월 30일자, 2면)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 『조선휘보(朝鮮彙報)』 등의 학술 잡지에 다수의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조선초의 법전(李氏國初の法典)」, 「조선왕비의 자서전(朝鮮王妃の自敍傳)」, 「경국대전 및 그 이후의 법전(經國大典及其の後の法典)」 등을 들 수 있다.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다량의 고서를 수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고위 관료이면서 학술 연구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경력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외국인의 손에 들어간 고문헌 가운데 상당수가 그러하듯, 그의 고문헌 수집 과정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아 있다. 그의 장서 가운데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정밀한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아사미는 우리나라에서 12년 정도 근무를 한 뒤, 1918년에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우리나라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할 때 수집한 고서들을 모두 가져갔는데, 이 문고는 훗날 미쯔이(三井) 재단에 팔렸다. 아사미문고는 이후 1950년에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미쯔이 재단의 문고를 일괄 구입할 때 다른 일본책과 함께 통째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현재는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매일신보 1918년 3월 7일자, 2면 기사
조선 법조계에서 조선통(朝鮮通)으로 유명하던 고등법원판사 아사미 린타로씨는 이번에 병으로 인해 사직하고 6일 오후 7시 50분 남대문 차로 13년만에 조선과 영영 이별하게 되었다. 아사미씨는 메이지 39년(1906)에 통감부 법무원 평정관으로 내임하였다. 부임 이래로 새 임지에 법관이 될 사람은 그 땅의 역사·인정·풍속·관습에 정통함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며 여가만 있으면 종로 사동(寺洞) 등지의 서점의 먼지 쌓인 곳에서 열심히 성히 고법전(古法典)을 찾아내었다. 이를 위하여는 수백금을 허비함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였다. 아사미씨의 이 연구에서 얻은 지식이 조선의 법률 제도상에 공헌한 것도 적지 않을 줄로 상상할 수가 있다. 일본과 조선인의 동화는 합병 이후의 중요한 문제이며 이 실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매한 우리 조선인을 친절히 지도할 만한 많은 인물들이 필요한데, 그 인물은 여러 해 조선에 거처하여 조선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조선 물정에 능통한 인물이라야 한다. 일본인 가운데 조선의 물정에 통달한 자를 조선통이라 칭하는데 근자 이래로 관민(官民) 간에 소위 조선통이 감축하는 영향이 있어 무족자는 우리 조선인을 위하여 항상 유감이었다. 그러던 중 소위 조선통 중의 조선통, 그 중에도 고관 중의 조선통인 아사미씨를 조선에서 영원히 잃게 됨은 실로 애석한 일이라. 그러나 아사미씨는 조선 체류 중에 얻은 원고를 정리하여 고법전과 역사상에 나타난 우리 조선인의 사상 계통을 분류한 책 한 권을 저술하여 세상에 보탬을 줄 계획이 있다고 하니 유감 중에 다행이라 하겠다. (매일신문 1918년 3월 7일, 2면 / 현대어로 윤문)
위의 신문 기사는 아사미가 우리나라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일본으로 귀국할 때의 기록이다. 비록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찬양이 지나치다는 느낌이다. 다만 객관적인 정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가 일제의 식민지 정책 수립에 매진한 인물이며, 법관으로서 조선의 법제와 역사 분야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러한 관심이 고문헌 수집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사미문고
아사미가 수집했던 장서는 일본을 거쳐 현재는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다. 아사미문고는 컬렉션의 수준이 상당히 높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문헌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수집되어 현재는 미국에 있다는 곡절로 인해 일찌감치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1995년 한국서지학회에서 천혜봉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여 문고 전체에 대한 서지 조사 작업을 완료하고 목록집을 간행하였다.
아사미문고는 고서 839종 4,013책과 탁본(금석문 자료) 155종으로 구성되어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전통적인 고서 분류 방식인 사부분류를 따르면 경부(經部) 69종 331책, 사부(史部) 240종 1,954책, 자부(子部) 189종 392책, 집부(集部) 341종 1,33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수집가에 의해 모인 여느 컬렉션보다도 정서(政書) 자료가 많다는 점이 가장 특징적이다. 여기에는 법관으로 근무했던 그의 이력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사미문고에 남아 있는 중 아사미가 직접 제작한 사본(寫本) 가운데 중요한 자료로는 『누판고(鏤板考)』, 『서서서목(西序書目)』, 『오대산사고목록(五臺山史庫目錄)』, 『와유록목록(臥遊錄目錄)』 등을 들 수 있다. 사본 자료의 작성 시기는 1910년부터 1915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 제10책 표지 안쪽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아사미의 자필로 적혀 있다. "내 소장본은 한 책이 빠져 있었다. 이에 마에마씨 소장본을 빌려 기술자를 시켜 베끼게 해 완본을 만들었다. 메이지 44년(1911) 6월 14일. 아사미 린타로.(余所藏缺落一本. 仍借前間氏藏本, 倩工謄寫爲完本. 明治四十四年六月十四日. 淺見倫太郞)"
좌하단에 장서인 "천견도서(淺見圖書)"가 날인되어 있다.
'천견도서(淺見圖書)' 장서인(좌측) / '천견(淺見)' 장서인(우측)
아사미가 사용한 장서인은 2종이 확인된다. 하나는 정방형에 “천견도서(淺見圖書)”라는 인문이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원형에 “천견(淺見)”이라는 인문이 적혀 있는데 이 도장은 편지를 봉함할 때 사용하는 투서(投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소장했던 모든 장서에 날인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장서인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사미문고본 가운데 총 14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