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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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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1864-1918)는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니가타현 출신이다. 13세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공부하다가 19세에 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소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27세에 결혼 후 북해도로 건너가 이듬해 11월까지 머물렀는데, 그 곳에서 『사학잡지(史學雜誌)』에 기고한 「고대반도흥폐개고(古代半島興廃概考)」가 학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이후 낙후생(落後生)이라는 필명으로 연속해서 사론(史論)을 발표하였는데, 그 가운데 『사해(史海)』에 투고한 논고가 눈에 띄어 학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28세에는 요미우리(読売) 신문사에 입사하였고 청일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파견되었는데, 이때부터 『대일본지명사서(大日本地名辭書)』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후 13년이 걸려 이 책을 탈고하였다. 총 11책 분량이며 원고의 두께만 해도 5미터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1901년에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의 강사가 되었고, 국사·동양사·지리 과목을 담당했다. 이후 와세다대학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세상을 떠났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와세다대학에서 유학을 한 사학계의 원로 이병도 교수가 요시다의 학문적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고문헌의 수집
요시다는 조선의 역사와 지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지속했지만 우리나라에 장기간 체류했던 적은 없는 듯하다. 그의 생평에 대한 정보를 찾아봐도 조선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우리나라 방문과 관련해서는 1915년 7월 30일에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들이 간행하던 잡지인 조선공론(朝鮮公論) 주최의 강연회에 강사로 초빙했다는 단편적인 기록(매일신보 1915년 7월 30일, 2면 단신) 정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국내의 인사들에게 그가 끼친 학문적 영향력은 제법 큰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병도 교수가 요시다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거니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역시 요시다가 세상을 떠난 직후에 매일신보에 다섯 차례에 걸쳐 죽음을 애도하며 학문적 성취를 높이 평가하는 글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매일신보 1918년 1월 29일자, 1면 기사 <故吉田東伍博士>, 최남선은 요시다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하며 그의 학문적 업적을 칭송하였다. 최남선은 1906년 와세다대학에 유학하며 요시다 도고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찌되었든 여러 가지 여러 가지 정황을 검토해 보면 그의 한국 고문헌 수집이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다는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그의 장서는 일본에서 수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요시다 구장본에 날인되어 있는 장서인을 확인해 보면 일본인 개인 혹은 사찰에서 사용한 장서인이 쉽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로를 통해 일본에 들어가 있던 자료를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서 수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1901년 이후 와세다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우리나라의 유학생들과 깊은 학문적 교류가 있었고, 이들을 통해 장서 수집에 도움을 얻지 않았을까 한다.
<대가문회(大家文會)> 권수제면 / 동양문고 소장
예를 들어, 위의 자료는 조선 중기의 문장가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엮은 『대가문회(大家文會)』로서, 1608년에 목판으로 간행된 자료이다. 표지 안쪽 공란에는 “萬曆三十六年八月日內賜吏曺判書鄭昌衍...左承旨臣朴[手決]”라는 내사기(內賜記)가 적혀 있어 선조 41년(1608)에 정창연(鄭昌衍, 1552-1636)에게 하사한 내사본(內賜本)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권수제면 우측 공란에 찍힌 물형인(物形印)의 인문 ‘강본(岡本)’, 권수제면 우하단 난외에 찍힌 인문 ‘강본장서기(岡本藏書記)’, 우상단 난외에 찍힌 ‘염마암도서부(閻魔庵圖書部)’는 모두 요코하마의 무역상이었던 오카모토(岡本久次郎)의 장서인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있던 장서를 요시다가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동양문고와 요시다 도고
동양문고에는 요시다 구장본이 24종 69책 소장되어 있다. 그가 소장했던 장서에는 ‘낙랑서재(樂浪書齋)’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어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장서인문은 자호인 낙랑(樂浪)에서 따온 것이다. 간혹 아래의 자료처럼 장서인이 찍혀 있지 않지만 표지에 첨부한 표식지로 요시다 구장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도 있다.
요시다 도고의 장서인 '낙랑서재(樂浪書齋)'(좌) / 요시다 도고의 구장본을 표시하는 '吉田' 표식지(우)
하지만 동양문고에 다수의 장서를 기증한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의 경우 동양문고와 일정한 관련이 있었던 반면 요시다의 경우는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실제 오늘날 전하는 요시다의 장서 가운데 상당수는 그가 근무했던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와세다대학 도서관에서는 요시다의 장서 295종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나라의 고문헌이다. 따라서 요시다가 수집한 한국 고문헌 가운데 다수는 와세다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 일부가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