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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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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소개
오구라 신페이는 동북지방의 미야기현 센다이시에서 출생하여 제2고등학교(센다이시 소재, 현 동북대학의 전신)를 졸업하고 1903년 동경제대 문과대학 문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는 언어학을 전공하고 1906년 ‘平安朝末期に至る音韻變遷(헤이안 시대 말기까지의 음운 변천)’으로 졸업논문을 썼다. 그 후 일본 근대 언어학의 중심으로 인정받는 우에다 가즈토시(上田萬年, 1867-1937)의 지도 아래 일본어학연구실 조수로 잠시 근무한 뒤(1906년) 약 4년간 대학원에서 일본어학(음운사)을 연구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國語撥音の歷史的觀察(일본어 撥音의 역사적 관찰)’(1908) 등 일본어 음운사와 관련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오구라 신페이는 처음 일본어학에 뜻을 두었으나 1911년에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한국에 부임하였다.

1911년 6월 3일, 오구라 신페이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편수서기로 임명되었다. 총독부에 근무하면서 경성고등보통학교(현재 경기고등학교) 교유(敎諭, 고등관 7등, 1911-1919) 및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교수(1917-1919)로 학생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6월에는 총독부 편수관(고등관 5등)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오구라 신페이는 교과서에 관한 일(구체적으로는 편집과의 서무 및 교과서 편수와 검정 업무)에다가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1920, 조선총독부) 편찬 관련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학사 시찰을 명목으로 전국 각지에서 방언 조사를 진행하였다. 1912년의 제주도를 시작으로 황해도(1913), 경상남도(1915), 경상북도(1916), 함경남도(1917), 충청남도와 전라남도(1918), 함경남도(1920), 전라북도와 충청북도(1921), 경상북도(1922), 강원도(1923) 등에서 방언 조사를 행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총독부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시대 규장각(1920년대 말에 경성 제대로 이관)의 고서·고문헌 및 자신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향가 및 문헌에 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였는데 그 결과의 하나로 조선어학사(朝鮮語學史)(1920)를 간행하며 한국어의 역사를 보충하고 이를 토대로 일본어와의 관계를 밝히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갔다.

이러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1924년 8월에서 1926년 4월까지 총독부의 재외연구원 자격으로 당시의 언어학의 중심지였던 유럽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개교하는 경성제대의 교수로 내정된 연구자를 해외로 파견하는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귀국 후 1926년 4월에, 오구라 신페이는 경성제대 조선어학·조선문학 전공 교수(고등관 3등)로 부임하였다. 그렇지만 총독부의 학무국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었다. 총독부 부속도서관장(1926-1929) 그리고 제2차 언문철자법 조사회 위원(1929)으로서의 활동 등이 그러한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다. 이 시기에도 한국어에 대한 조사·연구를 꾸준히 지속하면서 이희승(1896-1989)·방종현(1905-1952)·이숭녕(1908-1994)·김형규(1911-1996)·김사엽(1912-1992) 등의 국어학자를 배출하였다. 1927년에는 ‘鄕歌及び吏讀の硏究(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년 출간)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1924년에 탈고된 것으로, 한국어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집대성”이라 할 만하다. 이러한 점이 인정되어 1935년에 그는 일본 제국학사원의 은사상(恩賜賞)을 수상하였다. 이에 대해 수상 심사요지에서는 “東方比較言語學上に有用なる素材を提供したる業績(동양 비교언어학계에 유용한 소재를 제공한 업적)”이라 평하고 있다. 역시, 일본어와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 한국어사의 기초자료를 축적하였다는데 의의를 두었던 것이다.

이 무렵, 일본 어학계에서는 방언학회의 창립(1928)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가 〈蝸牛考(달팽이考)〉(『東京人類學雜誌』, 1927)를 통해 ‘方言周圈論’을 발표하였다. 이는 ‘달팽이’라는 단어의 방언형들이 보이는 분포를 통해, 정치·문화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오래된 형태를 보존하고 있음을 주장한 논문으로 오구라 신페이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판단된다. 1928년 이후부터 다음과 같은 제목의 업적, 즉 야나기타 구니오의 〈蝸牛考〉처럼 한 단어(주로 동물을 나타내는 단어)의 역사를 살피는 업적들이 매년 출현하는바 이러한 사실이 그 영향 관계를 직접적으로 시사한다.

1933년 3월 31일, 오구라 신페이는 동경제대 언어학과의 교수(고등관 2등, 이듬해에는 고등관 1등)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경성제대 교수를 겸임하여 매년 한 차례씩 한국에서 집중 강의를 진행하였다. 집중 강의를 위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어 방언에 대해 조사하기도하였다. 동경제대에서는 ‘言語學槪論, 言語學演習’, 경성제대에서는 ‘朝鮮語學槪論, 朝鮮語學史’ 등을 강의하였다. 1938년에 일본언어학회가 창립되자 오구라 신페이는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야나기타 구니오·橋本進吉·東條操등이 주도한 동경방언학회(1928년 창립, 1935년에 일본방언학회로 개칭)에도 간혹 참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제대 교수로서 그는, 해당 학회의 월례발표회에서 “朝鮮方言採集談”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시기 그는 동경제대 및 경성제대에서의 강의와 대외 활동, 그리고 자신이 해 온 여러 과제들을 끊임없이 보완·정리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자신의 방언 조사·연구를 집대성한 ‘朝鮮語方言の硏究’(상권 및 하권)를 간행하려던 중에 건강을 너무 상해 정년퇴직한 그 이듬해(1944년)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 있던 朝鮮語方言の硏究(한국어 방언의 연구)(岩波書店)는 그의 제자 시바타 다케시(柴田武, 1918-2007)에 의해그 해5월에 출간되었다.(朝鮮語方言の硏究 後記). 일본과 한국을 오간 그의 일생을 대표하는 업적이자, 유작이었다.
한국어학 연구자
오구라신페이는 한국어 연구에 매진하여 다수의 연구업적을 남겼다. 특히 고대어, 문법사, 이두, 방언 연구에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어 관련 저술로는 대표적으로 『조선어학사(朝鮮語学史)』, 『조선어 방언 연구(朝鮮語方言の研究)』, 『향가 및 이두 연구(郷歌及び吏読の研究)』 등을 들 수 있다. 1943년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문화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오구라는 약 20여년 간 조선에 머물면서 한국어 연구, 특히 향가와 이두 등 고어(古語) 연구에 매진하였다. 또한 총독부에서는 주로 교과서 편수와 검정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20년에 펴낸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와 같은 관력은 그의 한국어 연구와 깊이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12년에 제주도 방언을 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방언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연구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19일 3면 기사. "新羅語 硏究 爲해 말 타고다니며 方言 採集" 朝鮮語硏究에 半生 바친 小倉博士 談
먼저 내가 조선어를 알게 된 것은 가나사와 선생의 덕분이다. 메이지 39년 내가 동경제대 언어학과를 졸업할 당시 가나사와 선생은 일선양어동계론(日鮮兩語同系論)을 발표하여 학계에 물의를 일으켰을 때였다. 나도 이때 조선어에 대한 이상한 흥미와 아울러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받게 되어 우선 언문(諺文)을 가나사와 선생에게 배워 일한 한 덩이 되기 전인 메이지 43년에 조선에 와서 소위 총독부 편집서기란 직함으로 남산정(南山町)에 머물면서 국어는 조금도 모르는 최모(崔某)를 청하여 "문을 열어주시오", "천만에 말씀입니다"라는 향용 쓰는 말부터 손짓팔짓을 통하여 배웠다. 그러나 관청에 매인 몸이었던 만큼 말을 배우며 규장각(奎章閣)에서 고문서(古文書)를 찾아보기에 시간이 없어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아유가이(鮎貝房之進), 마에마(前間恭作) 두 선생의 지도를 많이 받았다. (매일신보 1942년 10월 19일, 3면 / 현대어로 윤문)
동경제대 교수직 정년퇴임을 앞두고 실린 대담 기사이다. 위의 대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오구라가 한국어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졸업 이후부터이다. 그러다 조선총독부 근무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업무의 여가에 연구를 병행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그가 당시 업무 관계로 규장각에서 고문서를 탐독했다는 점과, 아유까이 후사노신과 마에마 교사쿠로부터 사사받았다는 점이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어 연구와 함께 자연스럽게 한국어학 관련 고서 수집을 진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그는 한국어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다수 수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당시에 수집한 장서가 훗날 그의 연구에 밑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오늘날 동경대 오구라문고에 남아 있는 그의 장서에는 국어학, 어학 학습서가 많이 있다.